실제 경험이 말하는 진실, ‘항의’에서 ‘제안’으로
수십 년간 라틴아메리카의 농부들과 함께 생활한 이 책의 저자인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의 통찰력은 책상이 아니라 밭에서 갈고닦은 것이기에 더욱 빛난다. 그는 삶의 구체적 현장에 대한 고민 없이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검토 없이 유토피아만 제시하는 지식인을 비판하기도 했다. 정치와 경제를 따로 보지 않은 그는 국민의 부를 생성하는 경제 모델을 발전시키지 못한 공산주의의 무능력과 사회를 건설하는 데 민주주의와 인권의 존중을 출발점으로 삼지 못한 공산주의의 또 다른 무능 탓에 공산주의가 붕괴했다고 보았다. 어떤 ‘주의’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철학을 이 책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노동운동을 억압하면 살아남기 위해 극단적인 길을 택하게 되지만 활동의 장을 마련해 주면 좀 더 느긋하게 점진적인 발전을 향해 나갈 것이다. 공정 무역 제품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생산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소비자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으며 품질과 가격에 대한 기대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공정 무역이 확실히 자리 잡는 데 이바지한 저자들의 이야기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데다가 독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아서 좋다. ‘옳은 말씀’은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진리로 설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의 삶, 커피 재배 농부의 삶을 알고 나면 공정 무역 제품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딱딱한 ‘항의’가 아니라 부드러운 ‘제안’의 힘이다.
‘새로운 길을 열려면 시대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말이 본문에 있는데 이 책의 역사만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책이 처음 번역 출간된 것은 2004년 1월이며, 당시 제목은 ‘희망을 거래한다’였다. 그런데 독자의 기대보다 한발, 아니 여러 발 앞섰던지 출간 직후 언론의 지대한 관심이 있었는데도 지난 4년 동안 초판이 힘겹게 소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다 최근 공정 무역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출판사를 원망하는 독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체적으로는 공정 무역에 대한 책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제목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결국 출판사는 개정판을 펴내기로 결정했다.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제목을 고민하고, 번역상 실수가 없는지 살펴 바로잡았으며, 원서에 없는 부록을 통해 우리나라 공정 무역의 현황을 비롯해 공정 무역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을 실은 것이다. 한편 까만 농부의 손에 담긴 빨간 커피 열매가 인상적인 표지 사진은 ‘왈츠와 닥터만 커피 박물관’ 박종만 관장의 작품이다. 그동안 커피 박물관의 사진을 쓰고 싶다는 요청이 많았음에도 좀처럼 사진 이용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커피 박물관 측이 이 책에 사진이 쓰이는 것은 흔쾌히 허락했다. 전 세계 커피 산지를 두루 다닌 커피 박사로서는 당연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된다.
*저자소개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로서 칠레에 있다가 아옌데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가 일어나자 멕시코로 건너가 오악사카의 가난한 커피 재배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곳에서 농부들을 조직해 커피협동조합을 만들고 공정 무역이 널리 퍼지는 데 이바지했다.
니코 로전
종교 단체들의 개발 협력 기구인 ‘참여연대’에서 일하고 있다.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와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막스 하벨라르’라는 공정 무역 브랜드를 설립할 구상을 했다. 이 브랜드는 그로부터 15년 후 50여 개국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