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여행안내서가 아닙니다

 

에코북
서울 하늘 아래서 파리를 생각하던 정수복은 이제 파리 하늘 아래서 서울을 생각한다. 앎과 삶,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을 시도하는 사회학자 정수복이 파류에 체류하면서 쓴 ‘파리를 생각한다’ 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이 책에서 저자는 파리 체류 14년 동안 파리 곳곳을 산책한 사적 체험과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독서와 연구, 성찰과 사색의 순간들과 함께 아우르며 ‘품위 있는 삶을 위한 도시’의 조건을 탐색한다. 이 책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파리 산책 체험을 바탕으로 문학, 예술, 역사학, 철학, 사회학, 인류학, 지리학 등 분과학문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의미 있는 앎과 삶을 모색하는 저자의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의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럽 근대성의 수도 ‘파리’를 온몸으로 껴안으며, 도시 공간에 숨겨져 있는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삶의 환희와 비애의 흔적들을 찾아 나선다. 이 책을 통해 이제 우리도 파리에 대한 감각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의 이해를 넘어서 18세기 이후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 인권사상과 민주주의, 문화예술과 독창적인 인문사회과학의 전개를 통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유럽 ‘근대성의 수도’가 된 파리를 우리 나름대로 보고 해석할 수 있는 ‘한국인의 눈’을 갖게 됐다. 이 책은 도시 공간을 매개로 찾아 나선 유럽의 정신사이며, 오늘날 어쩔 수 없이 도시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삶을 위한 도시공간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어느 인문학자의 도시 산책기

 

이렇듯 이 책에는 저자가 낯섦과 익숙함 사이의 정신 상태에서 5,000개가 넘는 파리의 중심부와 변두리의 거리들을 다 걸어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며 쓴 글들이 실려 있다. 사회학자가 파리를 걷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걷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파리를 남다르게 걸었던 한국인, 일본인, 프랑스인 작가, 시인, 학자, 사상가, 화가, 사진작가, 영화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파리 걷기를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시켰는가? 파리를 이루고 있는 길과 건물, 기념비와 공원, 병원과 감옥, 묘지와 학교, 성당과 기차역 등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가? 파리라는 도시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어떤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가? 파리의 서로 다른 구역은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가? 왜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제일 가보고 싶은 도시로 파리를 꼽고, 왜 세계의 모든 작가와 예술가들은 파리에 와서 살고 싶어 하는가? 파리가 도시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파리를 파리답게 만드는가? 파리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생활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파리라는 도시공간을 활용하고 즐기며 사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런 질문들에 답하면서 도시인의 문화의식을 고양시키고 정신적 삶의 질을 높여주는 문화도시의 조건을 탐색하고 있다.

청계천 복원에 이어 광화문 광장이 조성되고 서울시 청사, 반포 브리지파크,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세운 녹지축, 용산 국제업무 지구, 마곡동 워터프론트 등을 비롯하여 서울을 ‘아시아의 서울’로 만들기 위한 거대 프로젝트들이 진행 중이다. 파리를 걸으며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한 분위기와 도시미학을 탐구한 이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다른 한편 정도 600년이 넘은 서울의 모습을 새롭게 비추어 보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오늘날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의 지방자치단체들도 더욱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도시의 문화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도시 걷기의 인문학’을 부제로 하는 이 책은 표면적인 도시 디자인을 넘어서 안으로부터 풍겨지는 품격 있는 도시 분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도시에 인문학적 숨결을 불어넣어 일상 속에서도 일상을 넘어서게 하는 분위기 있는 문화도시 만들기에 대한 풍부한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삶’을 위한 ‘도시’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이제 전 세계 인구의 5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 살고 우리나라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 산다. 도시화는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세계화라는 현상만큼이나 중요한 근ㆍ현대사적 역사 변동의 축이었지만 그동안 우리의 일상적 삶과 직결된 도시공간이 갖는 인문학적 의미에 대한 천착은 등한시됐다. 그러나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인간을 만든다. 이제 한국의 도시들도 생존을 위한 도시에서 삶을 위한 도시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삶은 어떤 삶이고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도시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문정신이 살아 있는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문정신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돈과 권력의 논리로부터 해방시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 작용이라면 의식의 상승과 고양이 가능한 도시는 어떻게 가능하며 정신의 하강과 추락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공간적 조치가 필요한가? 이것이 이 책이 제기하는 실천적 질문이다.

저돌적인 힘으로 앞으로만 돌진하는 상승기의 신흥도시에서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어렵다. 그런 도시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부리나케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지고 낙오자가 될 것만 같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그렇지 않다. 파리는 화려한 도시다. 그러나 오래된 세월의 이끼가 낀 역사적 기념비들, 센 강변과 공원의 조용한 산책로, 동네의 한적한 골목길들에는 인간 삶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일깨우는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파리가 자아내는 내면적 분위기는 세상의 모든 세속적 영광과 즐거움을 상대화시키고 아직 꺼지지 않은 삶의 불꽃을 다시 살려내며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런 파리의 ‘아우라’는 구름이나 안개를 타고오기도 하고 비를 동반하며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때로는 햇볕 내려 쪼이는 날 마로니에 나무의 그림자 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뤽상부르 공원의 보들레르 동상 주위를 배회하기도 한다. 잠시 숨 가쁜 일상을 떠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숨 쉬며 숨어 있을 자리, 조용히 걸으며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간, 예기치 않은 영감을 주는 장소가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의 마음 상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도 그런 도시가 필요하다.

 

*저자 소개

 

지은이 정수복은 스스로를 학문적, 지리적, 사회적 차원에서 고정된 경계선을 넘나드는 ‘탈(脫)경계 지식인’으로 생각한다. 1960년대 서울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1970년대에도 여전히 서울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대학시절 사회과학을 전공하면서도 문학, 철학, 역사학 등 인문학과 문화예술에 관심을 기울였다. 1980년대 파리에서 유학시절을 보냈으며, 1980년대 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귀국 이후 학술연구, 시민사회운동, 언론활동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세 꼭지점을 오가며 활동했다.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스스로의 행동에 부여하는 의미 구성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유럽의 새로운 사회운동과 한국의 시민운동에 대한 이론적 연구와 현장 연구를 진행했다. 환경운동과 생태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현대문명의 지속불가능성을 인식하고 문명전환의 가능성을 탐색했으며, 한국인의 일상문화를 연구하면서 대안적 삶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속도지상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느림의 가치를 새롭게 제시하기도 했다. 2002년에 두 번째로 도불하여 파리에 살고 있다. 2007년에는 한국출판문화대상을 수상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당연의 세계 낯설게 보기’를 펴냈다. 현재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의 ‘사회학적 개입 분석 연구소CADIS’ 초청연구원으로 있으며, 2007~2009년 사이에는 같은 학교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했다. 이 책을 시작으로 파리를 주제로 하는 몇 권의 연작을 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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