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정복형에서 자연 속 대화 등 산책문화로 변화

‘숲길 걷기’ 통해 삶과 자연의 소중함 재발견해

 

전범권 국장님.

▲ 산림청 산림이용국 전범권 국장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마라톤 붐이 일었다. 사실 생활체육의 토대가 취약한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일어난 마라톤 붐은 단순한 건강관리 차원의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젊음을 바친 조직, 영원할 것만 같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 광경을 지켜보며 믿을 것은 자신의 실력과 체력밖에 없다는 절박함으로 대표적인 극기 스포츠인 마라톤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고 10여년이 흘렀다.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고 이번에는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강타했고 한국사회도 어김없이 힘겨운 성장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새롭게 등장한 트렌드 중 하나는 뜻밖에도 ‘걷기’였다. 마라톤을 한다고 하면 하다못해 주위 사람들도 나름 대단하다는 평가를 하며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된다. 그러나 걷기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시선 때문에 걷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걷기에 빠졌다고 타인의 남다른 평가를 기대하는 경우도 없다. 그렇기에 걷기 열풍은 수십년간 한국인들의 가치관을 강압적으로 견인했던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식의 압축성장 모델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의미심장한 작은 사건이기도 했다.

 

걷기 열풍의 첫 번째 히트작은 제주도 ‘올레길’이었다. 올레길은 해발 1950m인 한라산 정상을 오르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올레길의 코스들은 따뜻한 남국의 해변가에서 시작해 중산간 지역으로 올라가는 듯하다가 조그만 오름 하나를 끼고 돌아 시골 마을을 지나 내려오는 식이었다. 오히려 올레길은 예전 우리 선조들이 산을 오르는 행위를 ‘입산(入山)’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지리적인 공간이동보다는 자기 내면의 내밀한 탐색과 같은 측면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의 지친 내면을 위로하는 듯 보였다.

 

산림청의 여러 정책 중 최근 가장 국민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 역시 숲길이다. 사실 ‘숲길’은 ‘걷기’와 ‘자연’이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콘크리트 도심을 떠나 숲속의 오솔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만나고 가족과 만나며, 침묵의 가치와 대화의 소중함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근래에 조성돼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숲길 역시 ‘지리산 둘레길(211㎞)’, ‘금강소나무숲길(33㎞)’, ‘한라산둘레길(9㎞)’, ‘울릉도둘레길(49㎞)’ 등과 같이 정상의 권위에서 벗어나 주변의 아름다움과 다양함에 초점을 맞춘 탈중심적인 코스들이다. 이제 사람들은 저 높은 곳에서 잠시 머무는 외로운 정상보다 하루하루의 평범한 일상을 닮은 친근한 숲길들에서 더욱 큰 애정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숲길 걷기와 같이 며칠이 소요되는 느린 여행은 사실 숲길 코스가 지나가는 농산촌 지역사회에도 기여하는 바가 결코 작지 않다. 숲길 주변의 마을에서의 민박, 식사, 신토불이 농․임산물의 구매 등으로 농가 수입이 늘어나게 되는데, 예컨대 숲길 개통으로 연간 5만명이 방문한다고 가정하면 해당 지역에 약 45억원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53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어찌보면 한국 사회가 그동안 가장 잃고 살았던 가치가 바로 ‘일상’과 ‘느림’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주위의 이른바 성공한 원로들이 가장 많이 하는 회고 중 하나는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에 대한 자부심과, 그렇기에 마음 한구석에 남은 회한 같은 것이었다. 이런 돌관(突貫)정신 때문에 대한민국은 성장했지만 그 때문에 우리의 일상은 초라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이 선진국다운 것은 사실 일상이 풍요롭고, 신뢰할만한 전통과 믿음, 장인정신이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진화된 사회가 숨 가쁜 기술진보와 무한경쟁 속에서도 공동체 내의 무게중심과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 역시 평범한 개인들의 일상이 건강하고, 긴 호흡의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두발로 자연스럽게 걷는 속도를 측정해보면 시속 4㎞ 정도라고 한다. 걸음이 빠른 사람이라고 해도 기껏 5~6㎞일 것이고, 느린 사람이라고 해도 시속 3㎞는 걸을 것이다. 사실 이 속도는 비행기나 고속철도, 자동차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속도일 것이다. 그러나 시속 4㎞는 풀과 나무가 자라는 속도, 우리의 아이들이 커 가는 속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정과 사랑이 자라나는 느림의 리듬과 속도를 닮아 있다. 혹시나 당신의 삶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들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의 삶의 에너지가 조금씩 고갈돼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지금 당장 자연 속을 방문해 초여름의 숲길을 걸어보시기를 권한다. 한없이 느리지만 정직하게 한발 한발 몸과 마음을 채워나가는 ‘인간의 속도’의 충만감을 만나시게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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