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의 쭉정이나 겨·먼지 등을 가려내는 농기구 중에 풍구가 있다. 지역에 따라 풍로․풍차라고도 불리는 풍구는 양쪽에 큰 바람구멍이 있고 큰 북 모양의 통 내부에 넓은 깃이 여러 개 달린 바퀴가 있다.

곡물을 풍구 위의 투입구로 넣고 바퀴와 연결된 손잡이를 돌리면 바람이 나오는데 이 바람의 힘으로 낟알과 티끌․쭉정이․왕겨 등의 잡물을 가려낸다.

가을철에 수확되는 대부분의 곡식은 풍구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이곳을 통과해야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이 판가름 난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것은 사람을 먹여 살리거나 재생산을 위해 보관되며, 쭉정이는 땔감이나 거름이 된다.

그런데 요즘 농촌에서는 이런 풍구를 거의 볼 수 없다. 전기를 이용한 새로운 기계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박물관 민속자료실에서나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는 풍구를 볼 수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이런 농기구는 자식들에게 설명하기 난처할 때가 많다. 현장이 없기 때문에 없는 현장을 설명하기가 어렵고, 있어야 할 장소에 없어서 본래의 역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알곡을 가려내는 역할을 포기하고 쭉정이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아주 가끔 이런 틀을 깨고 생활로 돌아오거나 박물관으로 가기를 거부한 농기구가 실생활에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농기구를 사용한 적이 있거나, 봤던 사람들에겐 옛날 시대 모습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는 이런 경험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우복리 서촌마을의 김형갑(67)·이금자(63) 씨 부부는 김장배추를 심기 위해 콩 타작이 한창이다. 이 마을은 38가구 중 15가구가 1만 6500㎡(약 5000평) 정도 콩을 재배하고 있다.

다른 집과 달리 이 부부의 수확장면이 눈에 띈 건 풍구 때문이다. 풍구는 이금자 씨가 시집오기 훨씬 전 시아버지가 이웃 북천면에서 있는 공작소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족히 80살이 넘는 셈이다.

갓 돌 지난 외손녀가 풍구 돌아가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풍구를 본 사람이라면 이 아이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도 실제 풍구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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