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보] 김영애 기자 = 1970년 한국인 최초로 유럽 오페라 무대에 올랐던 메조소프라노..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 오페라 단원을 비롯해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16년간 이름을 날렸던 성악가.. 독일 뒤셀도르프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뉴욕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등에서 독창회까지 가질 정도로 잘나가던 그, 김청자를 일컫는 수식어다.


1963년 외국 신부의 도움으로 독일에 간호조무사로 가게 된 그는 늘상 ‘내 꿈은 음악 공부’라고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돌보던 환자들을 통해 음악계의 은인을 만났고 독일에 온 지 5개월 만에 레오폴트 모차르트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라위 아이들과 제2의 인생을 시작하다


김청자가 아프리카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예순의 나이를 맞았던 2005년경이다. 안식년을 맞아 은퇴 후 삶을 준비하며 한 해 동안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던 그는 특별히 아프리카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인들의 삶, 그 안에서 발견되는 춤추며 노래하는 아름다운 삶’은 ‘그곳이 내 영혼의 고향이 될 것이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했다’고 고백했다. 2010년 2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정년퇴임한 그는 은퇴하자마자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 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9월, 보따리를 싸서 혈혈단신 아프리카 말라위로 날아갔다.

“난 평생 성악가로서 차고 넘치도록 누렸다. 명성과 인기도 얻었고 과분한 사랑도 받았다. 많은 분으로부터 너무 받기만 했다. 그 감사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2004년 12월 28일 내 나이 예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밤새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이듬해 남아공과 잠비아를 여행하면서 비로소 해답을 얻었다. 잠비아에서 뼈만 남은 아이들이 나한테 찰싹 매미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순간, 아∼마지막 ‘내 영혼의 고향’은 이곳이구나 깨달았다”

사랑을 얻기 위해 달려온 길 위에서 그 사랑을 만났다. 40여 년 화려한 음악 인생을 뒤로 하고 현지 아이들에게 ‘마미’, ‘마마’ 라고 불리며 제2의 여생을 보내고 있는 그는 왜 아프리카를 택한 것일까.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40도의 불볕더위와 온갖 불편함을 참아내며 말라위에 살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하느님 은총이 함께하시기 때문이죠. 저를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곳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바라볼 때의 ‘행복 체험’이 이곳에 머물게 합니다. 정말 놀라운 체험입니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고아들을 위해 음악학원을 세우고, 배우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에게 한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고자 혼신의 힘을 쏟으며 행복해 하는 그는 이제 여생을 메조소프라노 가수의 무대가 아니라 사랑과 화해와 감사의 삶으로 무대를 펼치고 있다.

말라위 추장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 ‘루세케로’(행복을 가져다주는 여인이란 뜻의 말라위 이름)처럼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많이 나누어야 하는 소명감으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김청자의 진솔한 삶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 김청자
*출판사: 바오로딸
*출처: 바오로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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