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과정에서 환경오염은 필연적이며, 오염물질 배출을 ‘0’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염 없는 사회를 만들려면 환경을 대가로 한 혜택을 줄여야 하는데 한 나라의 경제구조나 가치관, 여건 등에 따라 그 기준은 매우 다를 수 있다.

국민과 기업의 활동에 제한을 가하는 환경규제의 목적은 오염 없는 사회를 만들기 보다는 오염수준을 적정 규모로 유지해 사회적 후생수준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즉, 생산, 소비활동으로 인한 피해와 환경개선을 위해 치러야 할 사회적 희생 간에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한강 물을 어디서나 바로 마실 수 있는 1급수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정화능력까지 고려한 적정 배출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기준을 잡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규제는 어느 한 시점에서 종료될 일이 아니고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 정보제공과 소통, 합의가 필요하다.

자칫 일방적으로 호도되면 지금까지처럼 정치수단이 될 소지도 다분하다. 환경규제는 단순, 명료, 투명해야 하며,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만들어져야 한다.

급작스럽지 않고, 예시적이어야 하고 일관성과 지속성을 갖춰야 한다. 이중규제, 중복규제는 과감히 폐지해야 하겠지만 꼭 지켜야 할 것은 소신을 갖고 지켜내야 한다.

환경부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할 때가 됐다. 80년대식 규제일변도가 답이 아니듯 경제활동을 녹색으로 덧칠해서 그린이라고 커버해주거나 눈감아주는 것도 환경부 할 일은 아니다.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다 어정쩡 임기를 채운 환경부장관들이 할 일을 하지 않고 바뀌는 것은 그렇다 치자. 환경부 직원들은 제대로 자기 영역을 지키지 못하고서도 장관을 탓하며 얼굴을 못 들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치적 배경이나 정책 채택여부를 떠나 필요할 때 적용할 수 있는 현장 기초 조사나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서 허송세월한 환경부 부처 이기주의 집단은 더 큰 문제다.

한반도의 기후변화가 세계 최고수준으로 진행되면서 폭염으로 피해가 급증하고, 언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를 상황에서도 책임의식을 갖고 뛰는 환경부 공무원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럴 바에야 굳이 환경부라고 이름을 고집할 이유도 없다. ‘기후변화 환경경제부’는 어떨까. 당연한 말이지만 환경부는 ‘환경경제’로 다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환경부가 주역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사회와 경제, 환경의 연관성을 인정하면서 지속가능발전이라는 큰 판을 짜고 시장원리를 이용한 거버넌스로 개별 경제주체들이 유연하게 적응토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기업과 시민사회, 정부의 관계가 중요하다. 민간의 창의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부 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 소득의 36%를 가져가는 상위 1%의 사람들로 하여금 시민정신의 일환으로 자발적인 기부와 환경보전 활동에 앞장서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국가가 다하지 못하는 기후변화위기 적응 등 과제에 대해서도 기업이 적극적 관심과 사회책임 활동에 나서도록 촉구해야 한다. 장관이 바뀐다고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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