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사건을 바탕으로 가공한 르포소설

[환경일보] 김영애 기자 = 바른북스가 ‘여수역’을 출간했다.

이 책은 여순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들의 증언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간한 국가폭력 실태 조사서를 바탕으로 가공한 르포소설이다.

◇‘지금 여기’를 구성하는 현실과 삶, 르포소설 ‘여수역’

세상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은 똑같은 시간, 동일한 기억은 단 하나도 없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 변화하며 기억은 왜곡되거나 아전인수식으로 변형된다. 따라서 진실 역시 단 하나가 아니며, 똑같은 것도 아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항구성, 동일성의 표상이 아닌 것이다. 진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수히 변주되어 ‘지금 여기’를 구성한다. 지금 여기를 구성하는 것은 현실과 삶이다.

애초에 현실이 있었다. 일그러진 현실은 사건을 잉태하는 토양을 제공한다. 사건을 이야기로 드러내는 것을 르포르타주(reportage)라고 한다. 줄여서 ‘르포’로 쓴다. 어떤 사회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보고자(reporter)가 자신의 식견을 배경으로 하여 심층 취재하고 대상의 사이드 뉴스나 에피소드를 포함시켜 종합적인 기사로 완성하는 것이다. 르포는 신문의 보도기사와 기록문학 사이의 공간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기자의 르포와 달리 소설가의 르포는 독자적 특색을 갖는다.

소설가의 르포문학은 독자에게 훨씬 큰 울림을 주고 정서를 요동치게 만든다. 현실을 바탕으로 일어난 사건 사실을 정서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 공간이 내가 속한 곳이고 더구나 부모 형제 이웃에게서 일어난 것이라면 이는 세대를 달리해도 그 파장은 오히려 쓰나미 현상을 일으킨다.

그런데 문인의 르포문학이 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지배자의 입맛에 맞추어 호도한다면 그 유해한 파장은 인간 정신을 왜곡시키는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마치 뇌에 방사선을 지속적으로 쏘이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 결과는 나치 괴벨스의 예언과 들어맞는다.

그 유명한 괴벨스의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이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신문은 온통 용감한 국군이 폭악무도한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다는 보도를 해댔다. 심지어 화염방사기로 적의 토굴을 소탕하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보도를 거리낌 없이 해댔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 연계된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여순반란사건을 일으켰고 반란자들을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악마라고 규정하기 위해 문인조사반을 내려 보내 선전을 강화시켰다. ‘반란실정 문인조사반’ 일원으로 현지에 파견되었던 소설가 박종화는 반란자들이 “동족의 피를 보고 이리떼처럼 날치고 눈깔을 빼고 해골을 바시고 죽은 자의 시체 위에 총탄을 80여 방이나 놓은 잔인무도한 식인귀적 야만의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고 고발했다. 귀축(鬼畜)이라는 것이다.

나치의 괴벨스가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한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또 괴벨스는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반박하려면 수많은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할 때면 대중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세월이 괴벨스의 말을 증명하고 있다.

그동안 진보 역사학자들에 의해 여순사건의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서 수많은 문서와 증거들을 수집하고 노력해 왔으나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해서 심어진 왜곡된 진실은 아직까지 바로잡히지 못하고 있다. 세월 저 너머를 되돌아가서 들여다보기에는 현장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소설 ‘여수역’은 이런 점을 복구한다. 생생함을 그려내고자 자치 본질보다는 작가의 심정이 앞설 수 있는 르포문학을 경계하되 현장감을 통해 본질을 들여다보는 데 탁월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여순사건을 물론이고 여타 르포문학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르포문학이 아무리 현실을 사실 그대로 쓴다 해도, 언어의 특성상 현실을 있던 그대로 다 기록할 수는 없다. 보고 듣고 취재한 것과 작가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도 취사선택 과정을 거치면서 한계에 봉착하기도 한다. 소설 ‘여수역’은 이런 한계도 가볍게 뛰어넘는다. 뛰어난 상상력 덕분이다. 르포문학 작가에게 상상력이 더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소설 <여수역>은 옛 이야기가 아니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사건을 바탕으로 지금 현재 현상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공중부양하거나 초자연적 힘을 동원하지 않아도 현재 개인의 정신세계에 침투하고 있다. 더구나 정권유지를 위한 수단에 의해 심어진 반공이념이 어떻게 집단무의식으로 자리 잡았는지 작가는 예리하게 드러낸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손자세대를 낳아도 증오의 기억이 선혈처럼 지피는 우리의 현실을 르포소설 ‘여수역’은 인정하고 있다. 문중(門中)의 원한은 삼대가 지나면 소멸되거늘, 재발을 거듭하면서 점멸하는 이념충돌 광경을 요즘도 광화문과 시청 앞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버젓이 백주대낮 광화문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섬뜩한 구호를 외쳐대는 반공 공황증세 바이러스가 어떻게 심어졌는지 소설 ‘여수역’은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근원이었던 사건이 남도에서 있었다. 제주도 4.3사건과 쌍둥이 사건이지만, 1948년에 일어난 여순사건은 여전히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 채 위조지폐처럼 시중에 유통되어 왔다. 일제 말에서 미군정하의 해방공간 그리고 전쟁과 독재정권은 시민의 의식을 압살하고 이성적 사유를 짓뭉갠 지형을 굳혀왔다. 애국과 반역으로 공식화한 갈림에서 희생자는 물론 후손 또한 평생 감당하기 힘든 사상적 혐의를 뒤집어쓰고 살아와야 했던 세월이었다.

애매모호한 명칭인 여순사건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학계의 움직임은 있지만, 이를 당대모순에 의한 지역적 정서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은 지금까지 없었다. 르포소설 ‘여수역’은 작가의 발걸음으로 사실을 밟아나가면서 탁월한 식견과 통찰력으로 현재 대한민국 이중주소를 정치, 심리, 경제, 국제관계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한 면 없이 촘촘히 드러냈다. 르포문학이 다소 경직되고 딱딱하다는 선입감은 작가의 탁월하고 치밀한 전개방식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소설에서 나오는 사실 하나하나가 지니는 중요성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형성하는 데 기초 설계도 구성요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구체적 형상을, 밑바탕부터 전체적인 상황을 작가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러면서 여유 있게 문학적 예술성으로 승화시켜 나간다. 생생한 사실을 기록적으로 기술해 가는 르포소설을 뛰어넘어 픽션이 주는 상상적 재미와 논픽션이 뒷받침하는 생생함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 같다. 여기에 사실성과 현실성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의 탁월한 글 솜씨는 독자로 하여금 빨려들게 만든다.

역사는 재단하고 문학은 치유한다. 죽은 자를 위령하는 것이 문학이다. 소설 ‘여수역’은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살아서 사상적 꼬리표를 달고 살아내어야 했던 현재 후손의 상처를 치유한다. 치유는 화해를 전제로 한다. 화해 상생의 그 떨리는 문을 여는 소설이 ‘여수역’이다.

*저자: 양영제

*출판사: 바른북스

*출처: 바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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