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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 들려주는 노래 2]
정동길이 우리를 기억한다

[환경일보]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시청역은 평일에도 주말에도 오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평일에도 점심시간이면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고 다니는 직장인이나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문득 유행가 가사에 자주 등장하는 덕수궁 돌담길은 왜 유명한 것일까 궁금해졌다.

정동길이 시작되는 덕수궁 모퉁이를 돌면 자동차와 지하철의 소음이 갑자기 사라진다. 머릿속 번잡함에서 벗어나 조용한 사색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그리고 정동은 생각보다 유구한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름의 유래는 태조 이성계가 부인 신덕왕후 강 씨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능호를 ‘정릉’이라 한데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신의왕후의 소생이었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겨버리고 동네 이름에서도 ‘능’자를 빼 ‘정동’이 됐다.

1883년 정동 길에는 미국 공사관을 시작으로 영국,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아울러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덕수궁과 최초의 근대교육 기관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정동교회가 자리하며 시국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이 한식과 만났을 때’

서울주교좌성당

시청역 광장 쪽에 서서 맞은편을 바라보면 ‘서울 시내에 이런 건물이 있었나?’ 싶은 주홍색 지붕의 건물이 시선을 붙잡는다. 지붕 위에 십자가가 있는 이 건물은 1926년 지어진 서울주교좌성당이다. 대한성공회 교회당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처음 세워지고 나서 70년이 지난 1996년이다. 당시에는 예산 부족해 이보다 축소된 형태였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모습에 한 번 감탄하고 경운궁의 양이재, 한옥의 사제관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에 다시 미소 짓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거대한 11m 높이의 돔 모자이크와 성당에 울려 퍼지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마음이 경건하고 차분해진다. 창에서 내려오는 따사로운 빛을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그 빛은 단아한 한옥 창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정도 성당 규모에도 다른 조명 없이 오직 자연의 빛으로만 안을 밝힐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니 신을 대면하는 이 시간…. 세상의 어떤 외부 요소에도 방해받지 않으려는 순수한 열정이 느껴졌다.

서울주교좌성당에서 고종의 길로 새로 개방된 덕수궁 뒷길

서울주교좌성당을 나서면 영국대사관이 있고, 그 옆은 덕수궁 돌담길이다. 이렇게 덕수궁과 영국대사관 부지가 맞붙어 있어 1959년부터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됐었다. 하지만 이 길이 지난해 12월부터 개방됐다. 비록 70m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2017년 8월에 반환받은 구세군 중앙회관에서 영국 대사관 후문 쪽으로 이어진 미개방 길 100m까지 합쳐 모두 170m가 개방돼 덕수궁 주위를 끊어지지 않고 한 바퀴 돌 수 있다. 참고로 덕수궁 둘레길 전체 길이는 1.1km인데 지정된 시간에만 걸을 수 있고, 그 길 위에서 영국대사관 방향으로는 보안 문제로 사진은 찍을 수 없으니 유의해야 한다.

이 길을 걸으면 덕수궁 돌담길의 과거 모습을 담은 사진도 볼 수 있다. 사진 속 사람은 바뀌었지만 조금도 변함없는 길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사진은 물론 담장 너머 길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의 운치도 즐겨본다.

고종의 길에서 구 러시아 공사관 ‘아관파천의 길을 따라’

구 러시아 공사관

새로 개방된 덕수궁 뒷길을 걷다 보면 검은 철문 하나가 보이고 문 옆에는 ‘고종의 길’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다.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 고종이 구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사용한 길을 복원한 것으로 지난해 10월30일에 정식 개방됐다. 그 작은 문으로 들어가 걷다 보면 구 러시아 공사관이 있는 정동공원까지 다다른다. 그러나 이 길의 King's road란 이름이 선뜻 다가오지 않는 건 그 길 위를 지나간 치욕적 역사 때문일까.

정동에 들어선 공사관 중 우리 역사와 깊숙이 연관을 가진 구 러시아 공사관은 대부분 건물이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고, 지금은 공사관 건물 오른쪽에 있던 하얀 탑만 남아있다. 그 이국적인 건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그 시절도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중명전과 한규설 ‘을씨년스러운 기억’

중명전

정동극장의 왼쪽 길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역사 현장, 중명전이 있다. 덕수궁과 따로 떨어져 있어 상관없는 건물처럼 보이지만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하기 위해 석조전과 중명전 사이에 도로를 냈기 때문이다. 중명전은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덕수궁 별채로 지은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있었던 장소다.

건물의 왼쪽 방에 들어서면 방 안 가득 압박감이 흐른다. 남의 나라 외교권을 힘으로 빼앗으려는 이토 히로부미와 그 앞에 힘없는 나라의 무력한 우리 대신들이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다. 그 가운데 마지막까지 반대를 외쳤던 참정대신 한규설이 있었다. 그는 “칙령이라도 거부하겠다”며 완강히 반대하다가 끌려가 마루방에 홀로 갇히기도 했다.

결과가 너무나 분명한 자리에서 홀로 반대를 외쳤던 그는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은 후 남작의 지위를 내렸으나 한규설은 거부했고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해 이를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다. 나라를 잃고 어두운 상황에서 일신의 안일을 구하는 대신 나라를 구하려는 대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광복을 맞이했다.

배재학당과 정동 제일 교회 ‘아펜젤러가 남긴 가치’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정동에서 눈에 띄는 정동 제일 교회와 박물관으로 남아있는 배재학당은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이자 근대식 중등교육 기관이다. 두 곳 모두 1885년에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했다.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남아 있는 배재학당은 빨간 벽돌 건물로, 배재학당의 여러 채 건물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배재학당 동관이다. 안에 들어가면 이 학교 졸업생과 교장 아펜젤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1922년 편입생 김소월이나 나도향, 한글학자 주시경,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중화, 이윤재 등 많은 인물이 배재학당 출신이다. 아펜젤러는 학교에서 인재양성과 더불어 독립문 기공식에서 기도하고, 독립협회에서 연설했다. 또 독립신문 인쇄에도 간여해 조선의 독립에 힘썼다.

그가 세운 정동교회에서는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등사되고, 이곳에서 1920년 이화여고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이 치르지는 등 항일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모국은 아니지만 어려움에 부닥친 나라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분별 있는 삶을 살았던 그는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다. 목포로 가려고 탄 배가 충돌 사고가 일어나자 자신을 던져 조선의 소녀를 구했다.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결국 그가 산 모습에서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가려진다.

정동 전망대 ‘정동을 한눈에’

정동전망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바깥으로만 걷다 보면 돌담길 안쪽의 모습이 생각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돌담으로 가로막힌 시야를 탁 열어줄 장소가 있다. 바로 정동 전망대이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 서울 시립미술관을 지나면 덕수궁 오른쪽 돌담길로 나가는 길 왼쪽에 서울시 서소문 청사가 있다. 이 건물 13층에 올라가면 덕수궁 내부는 물론 오늘 하루 걸었던 주홍빛 지붕의 서울주교좌성당, 구 러시아 공관과 저 멀리 북악산까지 유리창 너머로 시원하게 보인다.

카페와 함께 운영돼 공간이 다소 협소하지만, 사람들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창문 너머를 바라보면 마음이 무척 흡족할 것이다. 참고로 덕수궁을 비롯해 덕수궁 돌담길 영국대사관 구간, 고종의 길,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등 월요일에 휴관한다.

<글·사진=박정은 자유기고가>

편집부  pres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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