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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선적인 시간관을 벗어난 여정[김중식 작가가 만난 뻔FUN한 예술가 ⑦] 도예가 김정범
Blue Head 25x25x32cm 2017 김정범
김정범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를 졸업하고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과 닮은 형상을 흙으로 빚고 뜨거운 불을 쐬어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실존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환경일보] “시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급변하는 요즘 시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욕구와 시간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문화적, 사회적 형식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그리고 세상에 널려있는 데이터를 조사하고 활용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 존재하던 것을 돌아보며 창조적인 생각을 키운다.”

김정범 작가의 작업은 전통의 새로운 계승이나 재해석의 하나로, 그간 해석된 이미지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파란색’은 유채색과 무채색을 뛰어넘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한가능성을 열어주는 세계를 품고 있다. <Blue Head> 작업에서는 언뜻 보면 어울릴 수 없는 것 같은 그림의 배치, 서로의 상이한 이질적인 형태들을 조합해 새로운 작업으로 구축해낸다. 이러한 조합은 익숙하면서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이 낯선 느낌 속에 곧 익숙한 것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낸다.

김정범의 작업은 사회 일반의 요구와 담론을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생경한 ‘푸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낯선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 속에는 과거의 익숙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낯선 느낌과 익숙함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이자 희망과 미래, 새로움을 꿈꾸게 한다. <작가소개 중에서>

기억을 매개하는 감각물 90x90x250cm porclien, eaethwear, acylic panel, cement 2015 김정범

공예와 순수예술의 분류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20세기 초 유럽 사회가 과거의 봉건적인 삶의 형태를 버리고 나아가는데, 현대미술도 그러한 흐름에 합류해야만 했다. 따라서 공예로부터 순수예술을 분류하고 우위에 놓으려는 시도는 단순히 미술사나 미술이론에서 의미 이상을 가진다. 그것은 미술에서 과거 전통으로의 결별을 통해 현대적인 시간 개념을 구현하려는 한 방식이었다. 물론 이러한 집착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 예술가들이 과거의 전통을 자신의 작업에 포용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기술적 숙련도와 미술사에 대한 지식, 사랑, 열정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김정범 작가의 세라믹 도기, 타블로, 설치 작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서구 회화사에서 나오는 명화의 이미지,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청백자의 기술을 끊임없이 사용하면서도 시사적인 이슈, 시간의 테마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예 vs. 회화, 3차원 vs. 2차원, 도기 vs. 설치의 다양한 분류를 혼용하는 김정범의 작업 특징을 보여준다. 나아가 작가가 현대적인 시간 개념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세라믹’이라는 인류 역사상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공예의 수법을 고수하면서도 표현적인 회화를 구현하거나 전구로 깊이를 알 수 없는 터널의 착시효과를 만들어 낸다. 시계 판 후면의 부품을 재구성해서 배치하는 과정은 과거, 현재, 미래의 단선적인 시간관으로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여정을 보여준다.

청백자의 현대적인 전용 ‘세라믹 도기’

Skull 130x162cm ceramic taile, acylic on canvas 2017 김정범

김정범은 세라믹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기법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전통을 고수하는 작가의 태도는 기술적인 과정에만 있지 않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푸른색을 예로 들어보자.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인 조토(Giotto)의 벽화에서 유래한 천상의 색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장 경건하고 차분한 정서적 반응을 자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17세기부터 유럽 귀족층으로 확대된 중국 청백자 또한 흰색과 코발트블루 계열의 색상으로 이뤄져 있다. 더치 상인들은 동인도 회사를 차리고 중국의 청백자를 유럽 각지에 유행시키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여기서 푸른색은 고귀하고 이국적인 중국 도자기의 한 전형을 유럽인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반면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접시, 회화, 타일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등장한다. 100호 캔버스 위에 타일을 올린 <Skull>(2018)에선 중앙에 붙여진 타일 뒤로 거대한 십자가 대열의 붓 자국이 나 있다. 또 도자기의 여백엔 코발트블루와 고귀하고 값비싼 색상의 대명사인 금색의 즉흥적인 붓질이 등장한다. 여기서 붓질은 작가가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붓질의 굵기와 방향성은 전통적으로 습득돼온 기술보다는 작가의 개인적이고 순간적인 상태를 반영한다. 보다 즉흥적이고 불규칙할수록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진다. 이 밖에도 푸른색을 사용해 그려 넣은 도자기의 모티브 중에서도 심상치 않은 것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총이나 각종 작은 도구, 기계와 같은 ‘잡동사니’들은 영락없이 현대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접하고 사용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김정범의 작업은 멀리서 볼 때는 전통 도기나 유럽의 모티브가 드문드문 들어가 있는 중국 청백자를 연상시키지만, 가까이서 보면 이질적인 요소들이 섞여 있다. 명화에 등장하는 거창한 귀족 복장을 한 인물들과 현대인의 물건들이 숨은 그림처럼 혼용돼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세라믹은 얼핏 여느 공예품처럼 보이면서도, 작가의 표현적이고 창조적인 요소들이 퍼즐처럼 숨기고 있다.

순수의 시대에서 심연을 만나다 ‘Innocent’

Innocente 100x100x120cm 거울, 와이어, LED조명, 세라믹 2018 김정범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한다는 측면에서만 작품을 본다면 최근 제작된 <Innocent>는 더욱 드라마틱하다. 작가는 1990년대 초부터 두상을 사용해 왔다. 최근에는 외신에서 흔히 접하는 장면들이 결합하면서 재난 속 어린이들이나 난민의 참혹상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타일 위에 그려진 장면에서 어린아이가 밑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고, 뒤쪽에는 거대한 폭발을 암시하는 버섯구름이 있다. 얼굴에서 이마가 차지하는 비중과 짧은 코, 둥그런 턱선은 전형적인 어린아이의 두상이다. 그러나 중후한 김정범의 재료들과 만나면서 어린아이의 두상은 더욱더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특히 이번 전시의 센터 피스에 해당하는 ‘두상’은 녹이 슨 굵은 와이어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여기서도 어김없이 오래된 재료와 현대적인 재료가 함께 사용된다. 어린아이의 두상은 시간적인 추이를 암시하는 녹슨 철사들로 암시된 것에 반해 전체 두상의 하단부에는 장난감 바퀴와 같이 생긴 금속으로 된 바퀴가 달려 있다. 두상 내부 중앙에는 반사거울이 있다. 거울 위로 하단에 위치한 전구의 불빛이 반사되면서 거울 표면을 위에서 보게 되면 깊이의 환영이 만들어진다. 전구 빛의 열들이 거울 위로, 아니 아래로 뻗으면서 SF 영화에 나오는 통로가 생겨난다. 유리 거울 위에는 화석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이 놓여 있다.

‘순수하다’라는 타이틀이 부쳐진 어린아이의 두상 안쪽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펼쳐진다. 생경하게 달린 전구의 열이 하단의 바퀴와 함께 ‘타임머신’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유리거울과 위에 놓인 화석 또한 묘한 조합이다. 문명이 고도로 발전된 시점과 그 이후 폐허의 이미지가 교차한다고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모든 시간적인 혼동이 ‘순수해 보이는’ 어린아이의 두상 속에 있다는 점이다. 삶의 출발점에 있는 어린아이는 이미 시간을 돌고 돌아 어른, 그 이후의 존재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와 미래가 연결된 지점에서

Blue ocean 1800x1800cm 2018 김정범

결국 작가에게 과거와 현재는 하나다. 과거는 끝없이 현재 속에서 발견되고 마찬가지로 현재는 과거의 언어를 끝없이 빌려온다. 시사적인 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린 장면들이나 물건의 이미지가 ‘여기, 우리’를 상징한다면 이를 작가는 중국 청백자의 양식 속에서 구현한다. 전통 장인처럼 작업의 세부적인 부분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과거의 전통에 예속시킨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간간이 들어가는 붓 자국은 오래된 전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몸부림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시계 내부의 부품을 해체해서 시계의 겉면이 아닌, 겉면 너머의 모습을 구현한 <Blue Ocean>은 가장 단순하지만 직접적으로 시간을 다룬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객관적인 기재를 해체함으로써 더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대신 흐르는 시간에 종속된 인간은 적어도 시계를 해체함으로써 그 시간성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삶의 태도에서 보자면 과거, 현재, 미래의 일직 선상에 놓인 시간적인 추이를 부정하는 것이며 암암리에 시간이 우리에게 강요해온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구속으로부터도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특정한 과거의 행동이 현재, 미래로 이어진다는 단선적인 사고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도예·예술가로서 40년 가까운 작업을 해온 작가가 개인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소재나 양식을 결합할 뿐 아니라 시간이라는 테마 자체를 다룬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작가의 여정을 특정한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목적 지향적인 행보가 아니라 결국은 그러한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내면에 위치한 두려움을 극복해가지 못한다. 유리거울에 반사되는 빛처럼 희망과 두려움은 지속해서 공존하며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시, 공간을 극복해서 일하고 소통할 수 있는 수많은 기재를 갖게 된 현대인은 더더욱 시간에 쫓기고 시간에 얽매인다. <Innocent>의 어두운 심연 속 전구의 빛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어떠한 존재인가.

이채빈 기자  green900@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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