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중식이 만난 뻔FUN한 예술가 ⑭] 안영상 사진문학가

안영상 제주도 사진작품

[환경일보] 삶은 긍정으로나 부정으로나 어느 것으로도 말해질 수 없다. 긍정한다고 해도 거짓이고 부정한다고 말해도 거짓이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언어는 매우 빈약한 것이다. 언어는 명확해야 하므로 오직 긍정과 부정밖에 모른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삶은 매우 풍요롭다. 삶은 긍정과 부정 사이의 무한한 단계의 색조를 알고 있다. 모든 색을 혼합하면 흑이 되며 모든 빛을 혼합하면 백이 된다. 흑과 백이라는 양극 사이에 진정한 세계가 존재한다. 이 양극 사이에서 총체적인 느낌과 기분을 느끼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지긋이 바라본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가만히 쉬도록 내버려 둔다. 명상에 잠긴 순간 이 세계가 스스로 존재를 드러낸다. 흑과 백 사이의 다양한 톤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내가 작업하는 방식이다. 아프리카의 황야에서나 제주도의 바닷가, 숲속에서 무심하게 바라본다. 의식의 흑백이 해체되고 거대서사와 같은 세계에 대한 인식이 사라질 때 각각의 장면들이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내가 나를 내려놓는 준비가 됐을 때 대지는 나를 초대한다. 

모래밭을 흐르는 작은 물줄기, 태평양이 바닷가 바위를 만나 부서지는 파도의 몸짓, 태양에서 부는 바람이 흔드는 갈대의 춤, 하늘과 바다가 만나 부둥켜안고 구르는 열락, 억겁의 우주를 지나온 물방울이 피우는 산 위의 구름, 떨어지는 동백꽃의 붉은 눈물······. 이들은 나를 초대해 기꺼이 내 사진 속에 현상되어 준다.

안영상 아프리카 사진작품

굳이 이런 드러남을 해석하지 않았으면 한다. 해석이란 이 세계를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진실이 보내는 신호는 그 사이에 있다. 그것은 미묘한 것이어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만일 말로 할 수 있었다면 사진으로서가 아니라, 말이나 글로 표현했을 것이다.

사진은 진실을 담을 수 있다. 현존하는 세계와 함께하며, 허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긋이 세계를 내 의식으로부터 돌려놓을 때, 그 섬의 신화가 말을 걸어오게 된다. 시와 마찬가지로 사랑해야 할 것이지 해석돼야 할 것이 아니다.

나의 스펙트럼을 굳이 해석하지 않았으면 한다. 조용히 내가 경험한 순간의 뉘앙스를 같이 누리고 알려지지 않은 파장을 같이 즐기며 이 세계 속에 살아 숨 쉬는 섬의 전설을 위해······. <작가노트 중에서>

안영상 아프리카 사진작품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 관한 책 <밝은 방>에서 사진의 엄중한 ‘사실성’에 주목했다. 사진은 ‘있는’ 사실을 찍어서 ‘있었던’ 사실로 만든다. 사진이 무엇보다도 사실을 찍는다는 점은 사진으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허구를 담지 못하도록 한다. 

안영상의 카메라 렌즈는 이러한 사진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제주도나 아프리카의 풍경을 아무런 문명의 왜곡 없이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는다. 그의 사진은 섣부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치 시(詩)가 그러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연풍경을 무심히 드러낸다.

안영상 아프리카 사진작품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에서 우리는 시간의 가혹함을 목도한다. 인물사진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 변하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시간에 종속된 운명적인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낸다. 안영상이 농담처럼 “사랑에 빠질까 봐 여자의 사진은 찍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심코 시간의 이러한 희생자를 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속박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아프리카는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순간을 사는 방식을 암시한다. 

아프리카 사진에도 이따금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풍경 일부로서 풍경 속에 녹아 들어있다. 사진 속 그들의 주름지고 억센 피부와 햇빛 속에 펼쳐진 지평선을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은 그들을 낳은 어머니인 대지와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시간의 변화가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살아있는 생명의 공존이다.

안영상 아프리카 사진작품

아프리카를 떠올리면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문명화가 덜 된 땅을 생각하지만, 그곳엔 그곳 나름의 문명과 삶의 방식, 밝은 지혜가 있다. 그곳의 자연과 대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매 순간을 살고 있으며, 과거에 붙들려있거나 현재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탐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시간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다. 현대 문명에 과도하게 중독된 사람들은 연대기적으로 묶인 모든 시간을 머리에 이고 다니듯 무거운 삶을 산다. 반면 그들의 삶은 매 순간 시간의 중력에서 깃털처럼 벗어난 축복일 뿐이다.

안영상 제주도 사진작품

안영상이 10년간 사진을 찍었던 아프리카에서 돌아와 제주도를 주목한 이유는 ‘바닷가 작은 바위 하나가 수만 년 동안 쉼 없이 파도와 부딪치며 물보라를 일으키고, 바다와 하늘이 만나 추는 춤, 그 춤의 뜨거운 숨이 한라산에 걸려 만들어 낸 구름, 구름이 바람 되어 흔들어 놓는 들판’과 같은 모습 때문이다. 도시화 또는 관광 개발이라는 끊임없는 문명화의 수난 속에서도 제주도라는 섬은 태고로부터 생명력을 본질적으로 잃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안영상의 카메라 렌즈 앞에 드러난 제주도나 아프리카는 모두 ‘시간의 테두리를 벗어난 생명의 땅’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수만 년 동안 바람과 파도에 부딪히며 거의 변함 없이 태초의 우주의 시간을 품고 있는 제주 바닷가의 돌과 바위들이나, 광대하게 펼쳐진 아프리카 초원은 모두가 같은 시원(始源)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다. 

안영상 제주도 사진작품

사람의 시간은 대지의 시간에 속해 있으면서도 점차 사람만의 독립적이고 한계 지워진 시간의 가두리에 속박됨으로써 그 대지의 생명과 분리돼 왔다. 사람들은 늘 서둘러서 보이는 대상을 해석하려 하고, 섣불리 자기 생각으로 규정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보는 것은 결국 자신의 헛된 욕망이 투사된 카르마(業)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 안영상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제주도와 아프리카의 풍경은 조용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그들의 나신 전체를 날 것으로 드러낸다.   

안영상은 10년간 아프리카를 오가며 광활한 자연과 현지인들의 소박한 삶을 사진으로 담아왔다.

안영상 사진문학가

시각과 문학의 합일을 추구하며 사진 작업과 집필을 해오고 있다. 2000년부터 약 30여회의 개인전, 기획전, 아프리카 후원전 등을 했다. 2010년 ‘나는 마사이족이다’(도서출판 멘토프레스)에서는 문화인류학으로서의 아프리카를 사진과 글로서 조명했다. 2015년에는 ‘제주도나 아프리카나-다 생명의 땅이므로’를 전시해 지구가  인위적으로 나뉠 수 없는 생명공동체임을 보여 줬다. 지금은 현실의 근원으로서 순수한 빛과 색을 사진상 파장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빛을 넘어서’ 안영상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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