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중식이 만난 뻔FUN한 예술가 ⑮] 김상수 작가

서양화가 김상수는 '공존의 시간'을 대명제로 연작 작업을 하고 있다.

[환경일보] 나의 작업이란 덜컥거리는 삶 속에서 많은 것과 부대끼며 생긴 울림, 작고 소중한 기억과 생각을 그려내는 행위이다. 그것이 감동의 울렁임이든 아픔의 출렁임이든 무언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상상하는 내면의 모습을 캔버스로 옮긴다. 그리고 기억 속에만 머무는 형상, 마음속에 각인돼 있던 시간의 잔상을 하얀 캔버스 공간 위, 오늘의 시간 속으로 끄집어낸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제의 색 위에 오늘의 색을 입힌다.

내 그림에는 고양이, 강아지, 얼룩말 등의 동물이 꾸준히 등장한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살아가는 이유나 방법이 제각각일 것이나 삶의 굴곡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작은 기쁨을 나누기 때문이다. 편안하고 친숙한 대상들에 우리의 삶을 투영하며 그리다 보면 과거의 기억이 슬며시 떠오르기도 한다. 주위를 한번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위로를 받기도 한다. <작가노트 중에서>

공존의 시간 - 시선, 주목된 외톨이 100x100cm Oil on canvas 2018 김상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등장한 동물들은 그들을 착취하던 인간을 내쫓고 삶의 주체로 나서 새로운 동물농장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나 의지와 다르게 농장의 시스템, 구성원들이 드러낸 권력욕, 부조리는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이솝우화에 등장한 온갖 동물들은 또 어떤가. 인간의 탐욕, 어리석음을 풍자하는데 열연을 아끼지 않는다. 

우화의 경우 대개 캐릭터와 관계의 ‘전형성’이 도드라지기 때문에 메시지는 해학적이지만 단호하게 전달된다. ‘동물 이야기’라는 표면을 바라볼 땐 그 삶에 대한 거리두기가 가능해지지만, 뒤틀린 풍경이 바로 우리의 삶 자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그 충격은 더 복잡하게 다가온다. 김상수가 보여주는 이야기에 이러한 우화의 코드가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존의 시간 - 행복 65.1x53cm Oil on canvas 2017 김상수

김상수의 화면은 차분하고 정적이지만, 그 조용한 장면 안으로 조심스럽게 관객의 시선을 유인한다.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공간 안에 개, 고양이, 얼룩말 등이 꽃 속에, 의자 위에, 자동차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색을 절제한 대신 대상의 묘사에 방점을 찍었다. 

그렇다고 아주 사실적 표현을 구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에 가깝다. 흑백의 음영 효과를 강조하니 인공적인 양감이 부각된다. 그의 화면에서 현실적인 시공간은 증발했다. 어쩌면 시공간이 박제화된 것일 수도 있다.

공존의 시간 - 만상의 꽃 145x145cm Oil on canvas 2017 김상수

<공존하는 시간>이라는 대명제 아래 풀어나간 시리즈의 소제목을 훑어보면 작가가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인간적 감정(그리움, 연민, 기다림)을 동물의 동작과 시선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존의 시간 – 만상의 꽃>에 이르면 한 공간에 어우러진 군상의 삶이 관계망으로 내용을 확장한다. 

둥글게 말려 있는 꽃잎 속에 파묻혀 있는 동물들은 마치 동굴 같은 이 꽃잎 밖으로 얼굴만 빠끔 내밀고 있는데, 작가에게 꽃은 생활공간의 상징물이다. 꽃잎 하나하나가 모여 이뤄지는 한 송이 꽃은 그에게 아파트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공존의 공간 안에서 캐릭터들은 미묘하게 시선을 교차하고 피하면서 그들의 관계를 암시한다. 다정한 시선은 외면당하기도 하고, 대상을 주시하지 않는 시선은 공허함을 전달한다.

공존의 시간 - 지하철 두 정거장의 생각 60.6x45.5cm Oil on canvas 2019 김상수

<공존의 시간 - 영욕의 자리>에서는 사회의 지배계급구조(하이어라키, hierarchy)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자리’의 효과적인 은유 수단인 의자를 중심에 두고 각자 자리를 잡고 있는 동물들 가운데 누군가는 다른 누구의 자리를 탐내고, 누구는 안분지족하고, 누구는 저 하늘 너머 다른 세상을 꿈꾸는 듯 시선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일상의 경쟁에서 흔히 마주하는 감정이 강렬한 발언이 아니라 동물들의 잔잔한 표정과 눈빛으로 표현된다. 

<공존의 시간 – 부장님, 안녕하세요?>, <공존의 시간 – 회장님, 저랑 등산 가실래요?>, <공존의 시간 – 작은 황태자 거인을 꿈꾸다> 등의 작품에서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표현이 제목과 더불어 더 본격화된다. 의자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도 등장하는데, 자동차 역시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 가운데 하나다. 자동차를 중심에 두고 안과 밖, 위와 아래로 몰려 있는 동물들의 백태는 자리로 규정되는 인간사회의 모습, 관계망, 권력, 욕망을 연상시킨다.

공존의 시간 - 최고의 자리 주목된 외톨이 97x130.3cm Oil on canvas 2016 김상수

김상수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우화 특유의 코드는 이렇게 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우화는 과장된 풍자미를 던지거나 무거운 교훈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절제된 감성으로, 상황을 포착하는 관찰자의 시선이 더 강하다. 이런 작업 태도와 표현방식은 세련미 넘치지만 서늘한 사람들, 도자기처럼 매끈하지만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도시인의 창백한 표정을 담담하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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