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중식이 만난 뻔FUN한 예술가 ⑲] 김영준 나전작가

황금나무 김영준作

[환경일보] 나는 빛을 좋아한다. 특히 자개의 빛은 너무나 황홀하다. 나에게 빛은 생명과도 같다. 빛에 따라 만물의 색채와 형태가 드러나고, 그렇게 드러난 사물의 모습을 다시 자개만이 가지고 있는 천연의 빛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인공조명이 개발되기 전까지 화면 속 빛은 상징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다. 빛에 관한 관심이 증대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 나타난 현상이다. 한낮의 자연광이 사라진 환경에서 어둠을 배경으로 인공조명이 자개를 비춰, 그것이 낮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현상에 나는 완전히 매료됐다.

빛의 각도에 따라, 보는 눈동자의 위치에 따라 자개 빛의 영롱함은 매번 다르게 느껴진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난 자개의 빛에 몸부림을 칠만큼 환호하게 되고, 그 속으로 무한히 빨려 들어가듯 창조의 혼을 느낀다.

빛은 두 가지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첫째 태양처럼 스스로 발광하는 물체로부터 전달되는 빛이며, 둘째 별이나 달처럼 발광체의 빛이 반사해 그 빛을 전달하는 것이다.

나의 작품 속 빛은 자연의 진주, 전복, 소라 등 30여 가지의 조개류에서 가공된 서로 다른 자개의 빛을 인공조명 빛에 반사해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빛이다. 그 빛은 보는 이의 시각적인 각도,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빛으로 반사된다. 더욱이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빛은 달리 보인다. 환하게 비치기도, 푸르게 보이기도 하고, 희망의 빛이 되기도 한다. 매 순간 다른 감성과 느낌으로 자개 빛의 영롱함과 오묘한 마력에 빠져든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자개의 빛과 그 빛에 따라 변하는 자개의 색채를 바라보면서 나는 삶을 조명한다. 명멸, 생성, 순환이 반복되는 우주 속에서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한 나의 삶에 대한 기록과 회상, 열정을 자개의 빛이 뿜어내는 다양한 빛에서 유추할 수 있다. 자개의 오묘함에 빠져 몸부림친 길고 긴 세월 끝에 빚어놓은 여러 작품을 바라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작가노트 중에서>

달항아리 김영준作

국보칠기 대표 김영준의 공방은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짧게는 석달에서 길게는 2년이 넘는 기간을 거쳐 탄생한 작품들은 나전칠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한숨에 뒤흔들 정도로 신선하다.

고려시대 이미 미학적인 완성을 이뤘던 나전칠기는 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전통 예술 중 하나로 손꼽힌다. 나전은 우리말로는 자개라고 한다. 전복, 소라, 조개껍데기를 가공해 기물 위에 붙여 장식하는 공예 기법이다. 

삼국시대에 당나라에서 전해졌지만, 오히려 한국과 일본에서 그 기술이 더욱 발전했다. 이렇듯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 나전이 발전하였으나 옻칠과 자개 공예를 함께 구현하는 기법은 우리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나전칠기는 보통 목재에 수십 번 반복해서 옻칠해 검게 윤이 나도록 가공한 뒤, 자개를 붙여 제작된다. 그래서 검은 바탕 위에 화사한 자개의 빛이 두드러지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김영준의 작품은 이런 일반적인 틀에서 벗어나 있다.

우선 자개의 바탕이 되는 목재의 도색에서부터 그의 작품이 가지는 특별함을 엿볼 수 있다. 깨끗한 화이트 바탕에 점점이 자개를 박은 ‘물방울 콘솔’은 자개의 묵직한 깊이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나전칠기 작품들을 통해 창백할 정도로 환한 빛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의 작품 속 자개들이 발하는 짙고 풍부한 명암에 감탄할 것이다.

파라다이스 김영준作

그런가 하면 낮은 테이블 전체를 자개로 덮은 ‘비잔틴 테이블’을 통해 자개의 또렷한 색감을 표현해내기도 했다. 화사한 소라 빛 테이블은 정사각형의 작은 자개 조각들로 이뤄져 더욱 입체감 있고 화사한 빛을 발한다. 자개에 이토록 선명한 색상이 존재했었나 싶을 만큼 놀랍다.

자개의 색채를 이용해 마치 회화작품을 그려내듯 표현하는 방법은 김영준만이 가능한 일이다. 꼬박 십년이 걸렸다. 여덟 자의 장 전면을 자개로 장식한 ‘파라다이스’를 보면 그가 만들어낸 자개의 채색 수준이 얼마나 정교한지 알 수 있다. 기존의 나전칠기가 바탕색과 대비되는 자개를 도안에 맞춰 붙여내는 것에 그쳤다면, 김영준의 나전칠기는 자개만으로도 회화적인 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엑스박스 김영준作

그는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색다른 요청을 받게 된다. 게임기 외부를 자개로 장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빌 게이츠가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선물하고자 제작을 요청한 것으로, 이때는 이미 나전칠기가 접목될 수 없는 영역이 없음을 확인했던 터였다. 그가 자개로 만든 ‘X-BOX’는 빌 게이츠 회장과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김영준 세 사람만이 소유하고 있다.

독일의 얀 파이프오르간은 새로 제작하는 파이프오르간의 전면 장식을 그에게 주문하기도 했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도 자신들의 상품에 그의 작품을 접목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 질문에 ‘디자인’이라는 명쾌한 답을 되돌린다. 나전칠기가 지닌 고급스러움과 실용성이 디자인적 요소로서도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김영준의 자개의 대중화에 대한 노력은 새로운 형태의 작품들을 통해 충분히 발현되고 있다. 아트 월로 제작된 ‘잃어버린 빛을 찾아서’는 2㎜의 세밀한 길이로 자른 자개들을 촘촘하게 이어 만든 작품이다. 

기존의 나전칠기가 옷장이나 함 등을 위한 장식의 소재로 사용되었다면, 그의 작품은 나전칠기가 주가 되는, 때로는 나전칠기 자체가 단독으로 작품을 이루는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고 있다. 그의 디자인적인 다양한 시도를 통해 나전칠기의 비중을 확대해 나간 것이다.

나전칠기가 단독으로 작품성을 갖게 되면서 나전칠기를 받아들이는 대상의 범위 역시 넓어졌다. 한정된 기물 위에서만 숨 쉬고 있던 나전칠기가 그야말로 무한대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전칠기 디자이너로서 김영준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그는 세대와 문화를 아우르는 새로운 나전칠기의 부흥을 꿈꾸기 때문이다.

사실 나전칠기는 오래된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현대에는 그 명맥을 잇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했다. 십년을 몸담았던 증권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도전을 시작한 김영준에게도 이러한 현실은 너무나 냉정하게 다가왔다. 나전칠기의 대를 잇기 위한 이들에게 국가적인 지원은커녕, 사람들의 관심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십년이 훌쩍 흘렀다. 그 사이 김영준은 옻칠과 자개의 가공, 나전칠기의 제작까지 모두 익힌 장인이 되어 있었다. 옻칠과 가공, 제작이 모두 제각각 이뤄지는 당시 시스템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김영준 작가는 디자이너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또다시 김영준만의 새로운 작품을 하는 것과 제자를 양성해 그들을 세계적인 작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아직도 나전칠기로 시도해보고 싶은 분야가 너무 많다는 김영준. 앞으로의 방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예상치 못했던 목표 하나를 털어놓았다. 유학 시절, 대영박물관에 마련된 한국관 안에 들어섰을 때였다. 몇 가지 유물이 전시된 한국관에서 나전칠기를 마주한 그는, 이 아름다운 유물이 그 빛을 잃고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것은 나전칠기의 본산지인 우리의 현주소였다. 여전히 나전칠기가 한국의 전통예술 기법임을 모르는 수많은 세계인 앞에, 여전히 이어져 숨 쉬고 있는 살아있는 작품을 보여주자, 이것이 그때의 그가 했던 다짐이었다.

예술이 가진 영속성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과 일치한다. 디자이너 김영준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 하나의 가교 구실을 하길 바란다. 과거 조상들이 전해준 이 뜨거운 예술혼을 지금의 그가 이어받았듯이, 다가올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그는 오늘의 전통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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