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중식이 만난 뻔FUN한 예술가 ㉞] 이태경 작가

incomplete1904 130x89cm oil on canvas 2019

[환경일보] “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그린다. 동시에 나는 나를 그린다.”(요즘은 주변인들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으로도 확장되었지만) 타인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심리적 변화를 발견해 간다는 표현은 자신의 심리적 변화를 발견하기 위해 삶의 조각들이 담긴 인물의 특징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주위의 대상(인물)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공통의 감각과 심리 속에 있는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 욕망과 억압 혹은 위선이나 사랑 등등에 대한 아이콘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타인 속에서 발견하는 나 자신은 어쩌면 세계와 나 사이 그 어딘가의 ‘우리’이거나 우리 중 누군가이기도 한 ‘나’일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바라보는 인물에 나의 시각이 개입(투영)되는 바로 그 지점은 타인 속의 나이면서 타인과의 소통을 열어 놓으려는 미적 정감이 자리하는 곳이다.

주변인에서 주변 환경으로 시각이 확장된 작업은 수없이 반복되고 중첩된 색들이 난무(亂舞)하고 있는 화면은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힐 것이다. ‘무엇이 보이는가?’ 보는(혹은 보이는) 행위가 눈에서 시작하지만 어떤 것은 실제로 눈이 사물을 보는 것과 아무 상관 없이 오히려 마음으로 느끼는 것,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 더 무게를 두는 때도 있다. 인물이란 매개체를 통해 나의 내면적 세계를 타인과 소통하고 정체성을 반추(反芻)한 것은 인물이란 실형(實形)을 그리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인물과 인물, 인물과 공간, 인물과 자신(自身) 등 관계 속에서 반응하는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아바타’인 것이다. 주변 환경으로의 시각확장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으로 보는 행위가 아닌, 들어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길을 잃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길을 혹은 여러 개의 길을 찾아 각자 나름의 출구를 만드는, 나 자신에게 또는 관객에게 내보이는 ‘공간’인 것이다. 이 몽환적인 공간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각과 감성과의 대화를 나누며 외형적 정의(定義)_‘인물’이든지 ‘풍경’이든지_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작품의 내재적 의미를 이해하기 바라는 바이다. <작가노트 중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너를 만난다

incomplete1902 130x89cm oil on canvas 2019

샤갈(Marc Chagall)이 그린 ‘일곱 손가락의 자화상’(Autoportrait aux sept doights)은 자신을 조물주와 같은 존재로 빗댄 그림이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자신을 창조주와 동일시하고픈 욕구는 그것을 표현하든 그렇지 않든, 남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예술가의 가슴 밑바닥에 잠재돼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 평범한 창조주 역할을 거부한 채 터질 만큼 부풀어 오른 자의식(自意識)으로 타인의 얼굴과 영혼을 소유해 버리고, 세상을 혼자만의 모노드라마로 바꿔 버린 작가가 있다. 파리 국립 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erieure des Beaux-Arts de Paris, DNSAP) 때부터 인물화를 작업해왔던 이태경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incomplete1903 130x89cm oil on canvas 2019

이태경의 ‘자화상’(Auto portrait)은 타인의 얼굴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찾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물주는 오로지 피조물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홀로 존재하지 않고 피조물과 더불어 공존하는 방식을 택한 이유다.

그는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능동적으로 대상을 선택하고, 여기에 자신의 내면을 담아왔다. 이로써 그림 속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남겨 버렸다. 실제로 그림 속에 자기 형상은 없다. 그저 다양한 연령대와 생김새를 가진 인물을 빌어 자신의 심리와 감정을 담았을 뿐이다. 이는 외적형식을 걷어 낸 우리 삶의 본질이 유사하거나 같아서 가능한 것이다.

“당신이 발탁되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

Mylene1801 100x50cm oil on canvas 2018

얼핏 봐선 보통의 인물 그림과 다른 바가 없는데 인물 모두가 작가 자신을 표현한 자화상이라니, 어떤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답이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제각각인데, 분위기의 기조는 유사하다. 그럴듯한 분장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1인극’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유사한 정서를 가진 인물들만을 찾아냈는가 아니면 그렇게 그려냈는가? 둘 다 정답이다. 작가 특유의 예민한 센서(sensor)를 작동시켜 자석처럼 그에게로 철썩 붙는 사람들을 자신의 왕국으로 초대한 것이다. 초대된 인물들은 또다시 작가의 필터(filter)에 걸러져 ‘이태경화’ 되어 화폭에 그려진다. 타인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란 바로 이 센서링(sensorring)과 필터링(filtering) 두 과정을 포괄하고 있는 타이틀인 셈이다.

크리키(Chriqui), 알렉산드르(Alexandre), 파스칼(Pascal), 쟈비에(Xavier), 시프리앙(Cyprien) 등 그림의 주인공은 모두 파리에 머물 당시 이태경의 주변인이었다. 이름에서 어림할 수 있듯, 모두 1997년부터 수년간 수학했던 파리 국립 미술학교 내의 인물들을 모델로 삼았다.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를 최대한 좁힌 것은 ‘자신’(self)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작가의 지독한 몰입의 반증이다.

또 심리적 거리 못지않게 물리적 거리를 중요성을 인식한 것에서 우리는 신체에서 선험적 의식을 역구성하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철학적 맥락을 만나게 된다. 현상적인 것을 통해 선험적인 것을 찾아 들어가는 것에 작가는 동의하고 있다. 만져지는 눈앞의 실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실체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Head of a Mr. Jung #1801 91x73cm oil on canvas 2018

그런데 어찌하여 물리적 거리의 ‘최소화’만 시도했을 뿐 ‘소멸’을 시도하지 않았는지 의아해진다. 왜 자신을 그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라캉(Jacques Lacan)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인간이 자신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자신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합당한 말이다. 우리 눈을 통해서는 자기 신체의 일부만 볼 수 있지만, 거울이라는 외부 매개를 통해 신체 전체를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주체성 확립의 실마리가 생기게 된다.

작가 이태경에게 자기인식은, 장님 코끼리 더듬기 식의 즉자적인 것이 아닌 총체적 통찰에의 갈망이다. 이는 라캉이 설명했듯 관념이 아닌 현상 즉, 타인이라는 외부세계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타인이라는 거울이 아니고서는 자신을 바라볼 수 없는 구조를 그는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다. 비록 거울을 통해야 하는 구조를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자기 상(像)만을 철저히 바라보려는 그의 의지는 결연하다. 그 결과가 바로 모델과의 물리적 거리를 최소화한 것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고로 나는 누구인가

h.w1501 160x112cm oil on canvas 2015

그러나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만으로 자동 자화상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의 센서는 더욱 특별한 것을 원했는데, 그것은 다소 엄격하고 음(陰) 하다.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어도, 순종적으로 보여서도, 즐거워 보여도, 감정이 쉽게 포착되어서도 안 된다. 물론 작가의 의도적인 선정기준은 결코 아니다. 모델과의 만남은 직관과 무의식에 더 의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복잡 미묘한 어른의 머릿속과 같이 느껴지는 건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이 고뇌하고 갈등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포착한 인간의 본질은 웃는 인간 혹은 우는 인간이 아닌 ‘웃으면서 눈물 흘리는 인간’, ‘모순과 갈등 속의 인간’이다. 이들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 붓을 든 치료사로서의 자기 자신, 화산처럼 폭발하는 다혈질적 내면 등을 만났다. 그리고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찾아냈다.

incomplete1905 162x112cm oil on canvas 2019

작가의 그림이 다소 음울하다고 여겨지는가?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본질이 과도히 비관적인가? 자신의 그림이 폭력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베이컨(Frances Bacan)은 “자신의 그림보다 현실이 더 폭력적”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실존은 이태경이 바라보는 인간과 그림보다 더 참담할 수 있다. 그 누구도 햇살 아래 피크닉 돗자리 위에서 인간 삶의 근원을 깨달을 순 없다. 멋지게 뻗은 나무는 음습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일정량의 습기와 어둠이야말로 뿌리가 버틸 수 있는 조건이다.

작가가 모순과 갈등에 천착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무던히도 극복하기 위함이며, 더 밝게 웃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베이컨은 극단의 참상묘사를 반복했지만, 이는 오히려 미래의 힘과 새로운 웃음의 능력을 삶에 부여해주는 것이라 역설되며 예찬 됐다. 베이컨의 그림 속엔 아이러니와 미묘한 장난기가 공존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기 세상이니 작가가 자기 그림판에서 조금만 더 자유롭게 난장을 부려봤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여본다. 울면서도 웃는 사람, 울면서도 웃는 그림. 양면성이 우리의 본질이니까 말이다.

이태경 LEE Tae Kyoung

이태경 작가는 주변인을 자신의 화면으로 초대해 고유한 센서링과 필터링을 거쳐 투영된 자화상을 그린다.

 이태경은 영화 ‘더 게임’ 속 극 중 인물들의 심리와 주제를 암시하기 위한 소품으로도 등장해 대중에게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계명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파리 국립 미술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연구과정을 이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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