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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과 날숨’의 인간학···정충일의 회화[서양화가 김중식이 만난 뻔FUN한 예술가 ㊼] 정충일 작가
들숨 100x100cm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20

[환경일보] 화가 정충일의 ‘순환, 물과물’ 연작은 그의 전작(全作)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띄어쓰기를 의도적으로 배반하는 ‘물과물’이라는 작명은 ‘과’라는 접속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물의 두 개념이 일원적 사유로부터 기원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즉 양자는 하나의 ‘근원적 물’에서 생성된 것임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물의 두 개념’이란 ‘물과물’이 서로 점유하면서 ‘근원적 물’이 존재하는 순환적 체계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I. ‘물과물’ : 물(物)로서의 물(水)

에너지-순환 130x162cm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16

‘물의 두 개념’이란 무엇이며, ‘근원적 물’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기독교의 창조 신화 중 하느님이 둘째 날에 행한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갈라놓는’ 사건에서 ‘물과물’이라는 주제어를 가져온다. 그러니까 정충일의 작업이 취한 물의 두 개념은 ‘물(하늘의 물)’과 ‘물(땅의 물)’이 피조(被造) 되는 태초의 창조적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그것(들)이 분리 전에는 애초에 ‘하나의 물’로 존재했었음을 증언한다.

정충일의 작품은 ‘하나의 물’에 기원하고 있는 ‘두 종류의 물’에 관한 존재 양태를 순환 체계로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 체계에는 두 개념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근원적 물’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만 할 과정을 표면적으로 전제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대립조차 무효화시키는 한 덩어리의 연쇄 고리일 뿐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정체성(하나의 물)과 타자의 정체성(또 다른 하나의 물)을 끊임없이 연쇄시키는 흐름과 운동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따라서 정충일의 회화는 ‘물(物)로서의 근원적 물(水)’이라는 일원론적 존재의 지평에서 갈라지고 분리된 ‘물(水)과물(水)’이 다시 ‘하나의 물(水/物)’로 회귀하기를 거듭하는 일련의 흐름을 가시화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II. 사물과 인간 존재의 운동성 : 순환, 길, 에너지

길-순환 20x20x20cm 49개 합판상자에 혼합재료 2019

정충일의 회화에는 가히 ‘유기물 시리즈’ 또는 ‘사물 시리즈’라 칭할 만한 요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2000년 초반 작가는 나무 패널의 중앙에 오목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짙은 유성의 질료를 담아낸 매우 개념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최근까지 확장되고 있는 이 기묘한 시리즈는 마치 모든 사물이 일자(一者)로서의 핵(核)으로부터 유출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물들의 탄생에 관한 내러티브’처럼 보인다. 사물들은 여기서 분명코 ‘존재자’의 개념으로 치환된다. ‘존재자’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 현전성’을 의미함으로써 주체는 물론, 모든 사물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정육면체 상자들은 모두 표정이 다르다. 상자 중앙 부분에 있는, 오목한 공간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드로잉들이 표면에 점유하거나 확산하는 표정이 제각기 다를 뿐만 아니라, 어떤 상자는 오목한 구멍이 부재한 채, 표면 위에 돌가루, 종이 찰흙 등이 혼종된 이질적인 질료가 다양한 모습으로 덧칠해져 있기도 하다. 상자의 표면 위 다양한 질료와 색 그리고 드로잉이 만드는 사물의 운동성은 그래서 제각기 다르다. 그것은 생성의 운동일 뿐만 아니라 소멸의 운동까지를 포함함으로써 마치 생로병사를 겪고 있는 인간의 삶의 노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의 인간 개별자 존재와 그 삶의 양태가 모두 제각기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품 속 상자는 ‘인간 존재에 대한 메타포’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 그의 최근 ‘박스 시리즈’는 각기 다른 표정과 양태로 ‘사물의 존재와 운동성’을 ‘인간 존재와 운동성’으로 은유한다. 멀티플 유형으로 전시장 벽을 가득히 메우거나 바닥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방식 또는 바닥에 옹기종기 군집해 있는 양태에 따라 이 박스 시리즈는 〈순환〉, 〈길〉, 〈에너지〉라는 각기 다른 제목으로 관객에게 자신을 선보인다.

III. 복구적 순환에 대한 성찰 : 유신론적 실존

에너지-순환1 145x60cm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20
에너지-순환2 145x60cm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20
에너지-순환3 145x60cm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20

정충일은 오랜 기간 ‘물과물’이라는 존재자(사물/주체)의 탄생과 그것들의 다양한 실존적 양태를 미술의 언어로 탐구하면서, 모든 존재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지점을 ‘일자(一者)를 향한 복구적 순환’으로 이해한다.

정충일에게 ‘일자’란 근원적 물(物)로서의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창조주 혹은 절대자라는 궁극적 지향점으로 나타난다. 즉 그의 존재자에 대한 실존론적 관심은 다분히 유신론적 실존을 지향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19세기 키르케고르(S. Kierkegaard)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적 면모, 더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적 실존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키르케고르의 기독교적 실존주의란 다분히 인간학적이다. 키르케고르가 ‘감성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라는 3단계의 인간의 자기 형성의 단계를 제시하면서 가장 완벽한 인간 실존의 단계를 ‘종교적 실존’에 두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다만 이 단계조차 그는 예외자이자 단독자로서의 ‘나’라는 주체를 폐기하지 않고 주체의 주관성에 근거한 기독교적 실존을 강조한다. 이러한 까닭에 교조화(敎條化)된 당대의 기독교가 그의 기독교적 실존주의를 정죄(定罪)하고 이단시했는데, 그 까닭은 ‘인간의 주관적 실존에 대한 그의 감각적, 비논리적, 주관적 맹신’ 때문이었다.

정충일의 작품에서 견지하고 있는 기독교적 실존은 극단적인 인간주의를 지향하지 않지만, 이러한 인간적 관심에 기초하고 있는 인간학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과 유비의 관계를 지닌다. 즉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통해 종교적 실존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언급하는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 신앙이 매일 매 순간 새로이 획득되어야 할 성질인 것처럼, 정충일이 지향하는 기독교적 신앙의 실천은 순간마다 회화의 되묻기로 거듭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모든 인식의 대상(타자를 포함하여)을 물(物)로서 상정하는 관점과 더불어 종교적 실존을 인간학의 관점에서 모색하는 ‘순환에 대한 성찰’이 어우러지면서 정초 되는 것이라 하겠다.

IV. 산포하는 빛 : 실존적 인간학

에너지-순환 72x91cm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18

실존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긴장 상태 또는 운동성이다. 실존적 인간학을 탐구하는 그의 회화는 물(水/物)의 개념과 더불어 운동성의 빛(光/物)을 탐구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세상을 향해 산포하는 빛, 방사선으로 분출하는 빛, 운무처럼 피어오르는 빛, 그리고 비처럼 내려앉는 빛처럼 빛 세계의 중심에는 언제나 ‘화이트홀’과 같은 근원적 공간이 자리한다. 때로는 오목한 네거티브의 공간으로, 때로는 순백의 색으로, 때로는 칠흑 같은 어둠의 색으로 나타나는 이것은 신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중력에 직립하고 있는 인간이 이 땅의 지평에서 찾아 나서야 할 자리이기도 하다.

“인간의 몸이란 단지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영혼을 감싸기 위해 필연적으로 빌어야 하는 껍질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과 삶의 모순과 인간의 내적 잠재력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과 투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작가 노트)

작가의 언급처럼 2013년 이래 최근작에는 그의 실존적 인간학이 꿈틀대고 있다. 특히 최근작에서는 마치 블라인드 창을 뚫고 어둠의 실내를 밝혀주고 있는 양상처럼 산포되는 빛이 표현된다. 이로써 ‘지금, 여기’라는 동시대의 현실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의 인간이 대면하고 있는 ‘실존’에 대한 관심을 여실히 드러낸다.

여기에 마치 날것의 육체의 덩어리만이 남은 듯한 인간 형상들이 가로축, 혹은 세로축으로 레이어를 만들어 내는 빛의 흐름 안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들은 우리에게 인간학의 탐구가 결코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것만이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이것은 노에마(noema, 지향하는 의식 작용의 대상)인 세상을 대면하는 인간 주체의 노에시스(noesis, 지향하는 의식 작용)와 아이스테시스(aisthēsis, 감각적 지각)를 통해 성취되는 힘겨운 과정을 전제한다.

V. 교통하는 공기 : 들숨과 날숨의 인간학

날숨 100x100cm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20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육적인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로 하는 공기에 관한 것이다. 작가 정충일은 최근 〈들숨, 날숨(expiratory-inspiratory)〉이라는 제명의 작품들에 천착하고 있다. “지구를 둘러싼 대기의 하층 부분에 있는 무색, 투명, 무취의 혼합 기체로서 질소 78.03%, 산소 20.95%와 소량의 각종 기체를 포함하는 물질”이라는 ‘공기에 관한 사전적 정의’를 넘어서는 곳에 그의 최근작은 위치한다. ‘들숨과 날숨’이란 ‘인간 생존에 필요한 산소뿐 아니라 필수적인 유기 물질을 함유하는 공기’를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존재하며, 코로 분별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공기! 그것은 다수의 인간이 늘 추상적 존재로 위치시킨 ‘신’과 같은 존재와 유비된다. 이처럼 ‘믿음으로 입증이 가능한 신의 존재’는 작가 정충일에게 ‘공기’와 같은 비유로 설명된다.

정충일 〈들숨, 날숨〉 연작을 살펴보자. 그중 최근작 〈날숨〉은 코발트블루 빛의 화면으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마치 방사형으로 산포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기의 움직임을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내뿜고 있는 ‘신의 날숨’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것은 마치 기독교 전승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라는 ‘신’의 로고스(logos)를 형상화한 것이거나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령(nephesh)을 불어넣어 ‘진흙으로 빚어진 육적 존재’를 ‘살아 있는 영적 인간’으로 탄생시킨 인간 창조에 관한 신화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의 날숨! 그것은 모든 존재를 근원적 일자로부터 생성하고 방출하는 화이트홀처럼 보인다.

신에게도 들숨이 있을까? 날숨의 존재조차 신화에서나 엿볼 수 있는 일이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것은 ‘들숨과 날숨’은 인간과 같은 생명체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 〈들숨, 날숨〉에는 푸른 빛 화면 위에 인간의 형상이 자리한다. 휘몰아치는 일 획 혹은 산포하는 듯한 질료의 확산 기운이 가득한 화면은 ‘신의 날숨’을 표현한 것일까? 그 옆에서 두 손을 모은 채로 직립한 인간 형상은 마치 ‘신의 날숨’ 혹은 ‘신의 은총’을 공기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공기를 호흡한다는 것은 산소와 대기의 유기 물질을 들숨과 날숨으로 받고 주기를 거듭하는 생명 지속을 위한 반복적 행위일 따름이지만, 어쩌면 신앙인들에게 그것은 신의 은총 혹은 신의 날숨을 인간의 들숨으로 받아들이고 날숨으로 다시 그것을 찬양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연작 〈들숨, 날숨〉은 한 인간 주체가 타자와 받기와 주기를 거듭하며 상호 소통하는 인간 관계학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충일의 예술 창작이란 ‘화가의 숨결’을 통해서 신과 교통하는 들숨과 날숨의 인간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다만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의미의 열어두기를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유신론적 실존을 인식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들숨과 날숨의 인간학’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다.

정충일 작가는 빛을 매개로 생명의 근원을 표현하고 있다.

이채빈 기자  green900@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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