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박열의사(朴烈義士)의 생가지를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그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문화재를 지정 신청한 결과 2차례의 문화재조사 및 위원회를 통해 2004년 6월 2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박열의사는 1902년 3월 12일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샘골부락에서 아버지 박지수와 어머니 정선동의 3남1녀 중 막내로 출생 했으며, 유년시절에는 혁식, 준식으로 불렸으나 이후 열(烈)로 개명했다.
 18세 되던(1919년)해 가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과 메이지대학 교외생으로 신문배달, 제지공장직공, 조선통역원 등을 하며 고학 조선청년들과 함께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바탕으로 조선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을 펼쳤으며, 이 때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와의 운명적 만남 또한 시작되었다.
 일왕과 황태자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 이후 대역죄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으며 4차례에 걸친 공판결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향후 무기로 감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인인 金子文子는 교살(자살이라고도 함)되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남편의 고향인 문경(문경읍 팔령리-현재 마성면 오천리 이장)에 안장 되었다.
 해방 후 23년간의 옥고를 마감하고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중, 6·25사변을 만나 납북되었다. 1974년 향년 74세로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1989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슬하에 아들 영일(예비역장성), 딸 경희(일본거주)를 두었다.

문경 정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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