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은 대체로 지금부터 6∼7천년전에 생겨났다고들 한다. 황하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도문명(인더스문명), 나일문명 등 4대문명을 말함이다.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아프리카 북부에서 발원한 이집트 나일문명을 빼고 나면 나머지가 다 아시아에서 비롯되었다.
2003년 이라크전쟁이 터지면서 파괴와 비극의 현장이 되고 말았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서양인의 주식인 밀이 인류 최초로 경작되고, 무역과 도시 개념과 설계 등도 아시아 문명권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당시 한민족도 한대륙을 중심으로 문명을 일으키고 있던 시기였다.
어쨌든 이렇게 보면 인류문명은 거의 전적으로 아시아인의 머리에서 손에서 출발한 셈이다.


유럽문명의 근본이라는 그리스·로마 문명도 아시아 문명의 토양에 토대 했고, 도움을 받은 것이다.
당시 지리적인 한계로 인해 동북아 문명이나 대륙문명이 교류되지는 않았지만 오리엔트(Orient. 동양) 문명이라 불리는 중동과 인도지역에서 꽃피운 문명이 그리스로 로마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특히 무역업을 하던 크레타인들이 오리엔트 문명을 그리스로 전파하면서 2천년 정도 늦게 옥시덴트(Occident. 헬레니즘)는 개화하기 시작했고 그리스가 지중해의 강자로 떠오르면서 유럽대륙에도 문명의 싹이 튼 것이다.
그리고 2천3백년 전에는 알렉산더왕이 정복 활동을 벌이면서 인도권 국경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다. 이후 등장한 로마가 그리스의 뒤를 이어가며 그 꽃을 피웠다.


유럽에서는 개인주의·인간 중심의 문화를 꽃피웠다고 주장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주장에도 모순과 결함은 있었으며, 실상 사람보다 신이나 초자연에 더욱 집착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인 듯 싶다. 다신교를 믿으면서 인간의 모습을 한 온갖 신을 받들었고 신전을 짓는 일에 열을 올렸다. 건축물이나 조각도 사람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었다.
특히 로마는 노예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가 극심했으며, 거의 파괴되어 그나마 몇 남지 않은 건축물 중에서도 그 대표적인 콜롯세움에서는 사람사냥을 집단적으로 즐기기도 했다.


유럽의 중세는 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지는 세월인데 그리스·로마문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철저하게 파괴했고 종교가 생활·정치·경제·문화 위에 서게 되면서 그야말로 1천년을 넘게 암흑시대가 지속되었다.
게다가 4C초반 이후에는 유라시아 초원에 살다 정벌에 나선 훈족(몽골·투르크계의 기마민족)이 라인강까지 진출하면서 밀려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현대 유럽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나마 사라센 제국 등에서 발달한 화려한 서아시아 이슬람문명은 암울한 유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혼란과 변화도 심했지만 인류문명의 초석이 될 중요한 진보를 계속해 나갔다. 종이가 나와 널리 보급됨은 물론 한국에서 목판·금속활자가 발명되면서 문명의 기록과 보존이 활성화되었고 온갖 기록물들이 쏟아져 나온 시절이기도 했다.
또한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화약이 발명되고 폭약이나 화포무기 등이 개발되면서 군사력도 당시에는 서양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동서양을 이은 역할은 아시아의 몽골제국이었다. 몽골의 20만 주력 군대는 유라시아 초원을 석권했고 이후 중원대륙과 동북아, 중동, 중앙아시아, 러시아와 동유럽을 하나하나 점령했다.
특히 1241년 바투 칸은 유럽을 맹공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은 도시국가 형태이거나 성(城)을 중심으로 잘게 쪼개져 있어 몽골군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2만의 군대조차 동원할 수 있는 국가가 전무했던 유럽이 전쟁에 단련된 몽골 15만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물론 호라즘(이슬람지대)까지 깡그리 불태워 버린 몽골이었지만, 몽골군이 다닌 길은 국경도 담장도 다 허물어졌기 때문에 활짝 트인 동서양의 문화교류의 길이 열린 것이다. 1270년 남송까지 멸망시키면서 찾아온 평화는 향후 1백년도 넘게 이어지면서 유럽은 아시아의 영향 아래서 서로의 존재와 이익을 공유해 나간 것이다.
특히 러시아·동유럽·중앙아시아 일대는 16세기까지 몽골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었으며, 다른 유럽지역도 몽골의 눈치를 살피던 처지였다.


유럽은 16세기 종교개혁이 주창되면서 암흑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의 의견서를 발표하면서 교황청을 정면 공격했고 츠빙글리와 칼뱅 등이 연이어 가세했다. 그리고 청교도주의, 중상주의 등 다양한 신조류가 나타났고 17C 후반 이후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종교가 물러선 자리를 대신했다.
특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싹이 돋아나면서 유럽은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17∼18C 계몽주의의 사상적 기초는 시민혁명을 낳았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시민과 자본가, 전문직업인과 지식인(부르조아)이 정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 이슬람문명의 수학과 과학기술, 항해술 등을 흡수하면서 세계무대로 한발짝 더 멀리 나갈 수 있게도 되었다. 무엇보다 막스 베버(1864∼1920)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즉 합리적 생활태도와 근대자본주의의 태동 등을 이론화하고 가치자유가 강화되면서 유럽과 유럽인, 유럽문명에 대해 확고한 자신감까지 채워나가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격동적 변화가 진행되었고 혼란속에서 숱한 내전과 전쟁도 경험했다.
이런 와중에 강한 군대와 자본을 축적했고 유럽인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총뿌리를 돌려 아프리카와 이슬람, 중남미, 아시아 등지로 향한 것이다.
다만 19C 중반이후 유럽열강이 제국주의적 힘을 뻗쳐오고 있었음에도 아시아는 혼란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유럽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유럽의 무기와 자본을 눈여겨 보지 않은 탓도 크다. 이러고서는 -아시아에서 받아들인- 함선을 앞세우고 강력한 총과 화약무기로 무장한 유럽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즈음까지도 동북아와 중원대륙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힘은 서양에 모자란 게 아니었다. 아시아의 문화수준과 생활상도 여전히 유럽을 능가하고 있었다.


서양은 미국이란 나라의 등장과 함께 그 문명적 힘(Power)이 더욱 강화되었다. 20C가 열리면서 미국은 세계적 강국이 되었고 지금은 EU 전체보다 더 경제규모가 큰 나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양자는 90년대 후반 그나마 태평양시대를 열며 기지개를 켜던 아시아를 다시한번 압도했다. 19C 중반이후 20C초에 이르는 제국주의 서구 열강에 의한 뼈아픈 과거에 이어 또다시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마냥 서양이 이성과 협력을 토대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이 증명되기도 한다.


유럽의 정신적 기초가 되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태교 등 모든 종교는 아시아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이렇게 보면 종교개혁이나 프로테스탄티즘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아시아의 정신세계나 가치관의 변형이자 재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싶다.
역사는 반복과 순환을 거듭하며 역전도 많았다. 21C 아시아의 힘과 역동성은 강한 만큼 이제 아시아의 단결과 단호한 선택을 통해 21C를 준비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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