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스님의 단식 100일과 관련하여 환경운동의 극단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시민들은 단식과 농성 같은 극단적 방식이 아니라 건설적 논의의 확대와 대안제시를 통한 환경운동을 원한다’고 한교수는 전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인지상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그 방법론적 접근의 문제가 용이하지 않은 것 또한 사회적 상정의 범주에 들어간다.
대화와 타협, 양보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예를 찾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이렇듯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게 된 것은 사회적 구조와 분외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말라버린 정과 건조해진 사람들의 가슴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점점 더 극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런 현상은 환경보다는 이념적인 측면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념을 논하는 사람들이나 정치인들의 행위는 관용과는 동떨어져 있다.
이러한 모습들과 극단적인 투쟁방식은 환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민들까지 점점 외면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실제로 환경단체의 회원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시민들은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정부의 정책수립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좋게만 보지 않는다는 일갈처럼 환경운동 종사자들이 자신만을 운동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지적했다.
환경을 지키는 것은 국민들의 의식을 통해서 자발적인 참여와 작은 실천에서 시작되어야 하지만, 그 선두에 선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서야 국민의 의식도 변화하는 것이다.
극단(團)의 선택이 마치 극단(極端)에 올려지는 연극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제156호
2005년 2월 23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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