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할아버지들이 재미난 옛날얘기를 해주실 때는 꼭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부터 시작한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왜 그리 재미난 얘기가 많던지, 갑자기 인왕산 여행을 하자니 호랑이가 생각난다.
인왕산은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고 높이는 338m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다른 산보다 특별한 점이 있다. 첫째, 인왕산은 화강암 덩어리로 돼 있기 때문에 다른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흙을 보기 힘들다. 둘째, 풍수지리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산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만약 인왕산이 없었다면 경복궁은 없었다?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봤던 종로의 궁궐들, 그 속에서 경복궁은 정궁으로서 나라를 움직이는 중심이 됐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경복궁은 4개의 산(남산·북악산·낙산·인왕산)이 둘러싸여 화재·풍수해·전쟁으로부터 궁궐을 보호하는 튼튼한 자연방패 역할을 했다.
이 중 경복궁의 오른쪽에는 인왕산이 자리해 궁궐을 보호했던 것이다. 인왕산은 낮고 평평해 궁궐에 있는 따뜻한 바람과 촉촉한 수분이 빠져다가는 것을 방지해 항상 좋은 흙을 밟을 수 있게 해줬다. 또한 돌산이기 때문에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지 못해 첩자들이 궁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막아주는 경복궁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정말 인왕산에 흰 호랑이가 있었을까.
인왕산에 정말 호랑이가 있었을까. 물론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전역에 호랑이가 살았다. 그러나 ‘인왕산호랑이’라는 말은 풍수지리상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되는 말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궁궐을 중심으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의 형세를 따랐고, 흰 호랑이가 궁궐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인왕산으로 가는 길의 즐거움, 봄 벚나무 길과 가을 복자기 나무 단풍
인왕산에 가기까지는 볼거리들이 상당히 많다. 그중 하나가 사직을 관리했던 사직단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있는 황학정이다. 사직단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토의 주인인 사(社)와 오곡의 우두머리인 직(稷)의 두 신 위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농산물 개방 등으로 농민이 한숨만 쉬고 있는 지금, 한 나라의 임금님이 몸소 오셔서 나라의 농사를 위해 제사를 드리던 그때가 그립다.
사직단을 지나 사직공원 너머로 멋진 황학정이 보인다. 황학정은 100년이 훨씬 넘은 국궁 터로 인왕산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봄에는 벚나무 꽃잎과 개나리·진달래, 가을이면 복자기 단풍 속에서 자연과 벗하며 심신을 수련할 수 있는 곳이다.
봄에는 돌산에서 내려오는 산들바람에 벚꽃 비를 맞을 수 있다. 요즘에는 여기저기서 5월이면 벚꽃축제를 하지만, 그 어떤 곳보다 나는 이곳을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가을에는 단풍나무와 복자기나무를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5개의 손가락 모양 잎과는 달리 복자기나무는 타원형 잎이 세 개씩 붙어 있다. 예쁜 잎을 가진 단풍나무처럼 처음부터 주목받는 나무는 아니지만, 단풍이 들수록 초록색의 복자기나무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단풍으로 변한다. 그리고 하얗고 조금씩 갈라지는 독특한 나무껍데기는 복자기나무의 단조로움을 덮어준다.

이제 본격적으로 돌산 속으로 생태기행을 해볼까.
인왕산은 얕고 돌로 된 산이라 다른 산에 비해 생물의 종류는 다양하지 않다. 하지만 돌산에서 살고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고, 개발되지 않은 곳이라 자연을 느낄 수 있다.
황학정을 거쳐 인왕산 입구로 올라가면 돌산에서 자라는 멋진 소나무를 볼 수 있다. 생명력 강한 소나무 뿌리는 딱딱한 화강암도 파고들어 자신의 생명을 지켜낸다. 뿌리를 덮어줄 흙이 없음을 아는지, 소나무 뿌리는 딱딱하고 굵어져 표면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소나무는 자신을 지켜낸다. 하지만 인왕산도 나이가 들면서 천이(Succession)를 한다. 돌산에 풀이 나고, 관목·교목이 자라고 척박한 토양에서도 자라는 소나무가 우점하게 된다. 하지만 잎이 넓은 참나무류들이 숲에 들어오면 소나무는 햇빛을 못 받게 되고 소나무는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인왕산도 천이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는 산이다.

식물들 사이에도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같은 참나무라고 해도 서로 지킬 것은 지켜가면서 산다. 햇빛이 잘 받는 쪽은 잎이 얇고 작은 상수리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잎이 얇고 작으면 그만큼 광합성 양이 적기 때문에 그늘에서는 살기 어려워진다. 반면 잎이 크고 두꺼운 굴참나무나 떡갈나무들은 그늘에서도 잘 살아간다. 서로 배려하며 살아가니 참 기특한 나무들이다.
지금쯤 싸리나무의 멋들어진 단풍을 볼 수 있다. 척박한 토양에서도 열심히 자라는 싸리나무가 유난히 기특해 보인다. 소담스럽게 단풍이 든 생각나무 옆을 지나가면 달콤하고 톡 쏘는 생강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인왕산에 살고 있는 작은 동·생물은 무얼 먹고 살까.
다른 데서는 흔한 감나무·밤나무도 별로 없지만 인왕산에는 제법 많은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여기저기서 산새 소리도 많이 들리고, 나무 위를 휙 뛰어다니는 작은 동물들도 볼 수 있다. 또 족적이나 배설물을 통해 족제비 등이 살고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팥배나무·주목·잣·산딸기·산벚·참나무의 열매들은 작은 동물들에게 별미를 제공한다. 또한 열매를 먹은 동물의 배설물을 통해 다른 곳으로 퍼져 자라는 영광(?)을 얻게 된다. 또 겨울철이면 저장을 잘 하는 다람쥐 덕분에 도토리 열매는 땅 속에 묻혀 몇 해가 지난 뒤 작은 나무로 자라는 기회도 얻게 된다. 이렇게 식물과 동물은 서로 도와가며 살아간다.
무엇보다도 인왕산의 물을 머금은 작은 우물은 수생식물과 여러 새들, 작은 소동물이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다.

인왕산 사이로 갈린 도로를 보며
산책을 하면서 종종 군인에게 검문을 받기도 하겠지만, 청와대가 있어서 그러려니 하지만, 청와대 때문에 인왕산은 두 동강으로 나뉘었다. 도로 폭은 작지만, 그 작은 폭이 인왕산에서 살아가는 작은 동물들에게는 넘어갈 수 없는 벽이 됐다. 도로를 기점으로 인왕산에는 넘지 못한 두 생태계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다른 산에 비해 출입하는 입장객도 적고 도로를 이용하는 차량도 거의 통제되므로 2차 생태계 파괴가 심각하지 않은 상태라 그나마 다행이다.

인왕산이 준 또 하나의 선물, 청운약수터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이다. 종로구 옥인동으로 나오는 곳에는 작은 해맞이공원과 청운약수터가 자리 잡고 있다. 돌산이니 다른 산에 비해 머금을 물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깨끗한 물을 매일같이 우리에게 내주는 산에게 고마울 뿐이다. 인왕산 숲 속의 작은 개울에서는 적지만 신기하게 물이 마르지 않고, 그 덕분에 생물들은 살아갈 수 있다.

국립공원처럼 장엄하고 형형색색 화려한 산은 아니지만, 우리의 역사와 문화, 생태가 살아 숨쉬는 소담하고 생기 있는 인왕산을 매일 볼 수 있어서 무척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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