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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년의 정의(正義)’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전국 방방곡곡이 새마을노래와 건설의 메아리로 울려 퍼지던 1960년대 중반. H씨가 14세로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일이다.

소년이 사는 마을에는 113호의 가구가 살았는데, 가구당 4~6명으로 계산하면 마을 전체 인구가 600~700여 명에 달하는 노동력 풍부한 마을이었다. 당시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추수가 끝난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마을 하천과 수로정비를 하는 ‘새마을 취로사업 공사’를 벌여 남자는 일당 5000원, 여자는 3000원의 노임을 지급했다. 겨울 농한기에 어른 노동력이 많은 가구에게는 겨울동안 큰 수입원이기도 했다. 소년의 부친도 취로사업에 나가곤 했는데 며칠은 나가고 여러 날은 거르곤 했다.
한편 노동력을 관리했던 마을 이장 L씨는 도박과 주색에 취해 벼가 자라고 있는 칠월의 논을 수십 마지기씩 도박 대금으로 날리고 가정생활이 방탕해 마을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아침 소년은 학교 일로 부친의 도장이 필요했다. 부친은 이장 댁에 가서 도장을 찾아오라고 하셨다. 노동 품수 계산 때문에 마을 사람의 도장을 이장이 모두 받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이장은 부재중이었고 이장의 모친인 할머니께서 “사랑방 장롱 밑에 있으니 찾아가라”고 하셨다. 소년은 이장 댁 사랑방 장롱 밑에서 도장이 수북이 쌓인 상자를 찾았다. 마을의 노동력 인구 전체의 도장 수 백 개가 그 속에 있었다.
소년은 부친의 도장을 찾고 도장 상자를 장롱 밑으로 밀어 넣다가 우연히 장부 한 권을 발견했다. 무심코 표지를 넘겨보니 가나다순으로 이름이 적혀 있고, 일 나간 날짜에 하루도 빠짐없이 도장이 찍혀 있었다. 소년은 호기심으로 부친의 함자를 찾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부친은 하루나 이틀 일 나가시면 사나흘씩 일을 거르곤 하셨는데 1일부터 30일까지 모두 도장이 찍혀 있었던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장롱 아래를 살펴보니 장부가 한 권 더 있었다. 그 장부에는 부친께서 일하신 날짜에만 도장이 찍혀 있었다. 순간 소년은 이장이 이중장부를 만들어 마을 사람 전체의 노임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1인당 월 4~6일 일을 시키고 다른 장부에는 30일 동안 일한 것으로 도장을 찍어 놓았으니 불과 14살의 소년이 판단하기에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400명이 넘는 노동력을 1인당 불과 4~6일씩 돌아가며 부리고 30일 일한 것으로 가짜 장부를 만들어 돈을 훔쳤으니, 언뜻 계산해도 월 1000명 분에 겨울 3개월 기간을 따지면 3000명의 노임으로 약 1500여 만원을 훔친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장은 그 엄청난 돈을 빼내다가 도박과 주색잡기에 빠져 있는 철면피하고 부도덕한 도적질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건강하신 부친께서 일 좀 나가게 해달라고 사정하면 교만하게 거드름을 피우고 못들은 체 대문 앞을 지나치곤 하던 이장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일이라 여겨 가짜 노임장부 한 권을 들고 몰래 집으로 돌아와 짚더미 속에 숨겨 놓았다. 소년은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민하고 들녘을 배회했다. 부친께 털어놓을까도 생각했지만 필경 부친께 다리가 두 동강이 날 것 같아 두려웠다. 밤새 뒤척이던 소년은 새벽녘에 일어나 경찰서장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이 부정을 꼭 밝혀서 정의를 찾아주시고 이장이 훔친 돈은 마을 사람들에게 꼭 노임으로 일해서 돌려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하얀 경찰차 한 대가 마을에 나타났고 사복형사 두 명이 소년의 집을 찾아왔다. 사태는 급변했다. 부친의 천지를 쪼갤 듯 한 부라림과 노여움에 집안이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무슨 몹쓸 짓을 했느냐는 질책이셨다. 소년은 부친께 “이것은 나랏돈을 훔쳐 빼내 쓴 부정한 일이며 저는 옳은 일 한 것으로 알려질 것이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형사 두 명도 정중하게 부친을 안심시키고 소년과 동행해 읍내에 있는 경찰서 서장실로 데리고 갔다. 경찰서장이 물었다. “어떻게 처리하기를 바라느냐”는 것이었다. 소년은 “허위 장부를 작성해 횡령한 돈을 전액 마을 사람에게 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경찰서장이 다시 물었다. “이장과 가담한 사람 모두를 처벌하기를 바라느냐”고. 소년은 “처벌은 원치 않지만 이장은 도박으로 논과 밭 재산 다 날리고 농민들에게 지급해야 할 품값을 수천만원 훔쳐 공무원들과 나눠먹었으며, 도박하고 둘째부인 얻어 살림을 차리는 데 나랏돈을 탕진했으니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서장이 빙긋이 웃고 나서 “꼭 네 뜻대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오전 9시, 아침 밥상을 치우자마자 소년의 집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형사 두 명이 앞에 서고 면장, 산업계장, 주사, 군청내무과장, 산업과장, 계장, 리 새마을지도자, 면 새마을 지도자, 이장 등 9명이 소년의 집 안방에 몰려와 소년과 부친을 향해 마주 앉았다. 형사 두 명을 제외한 9명의 어른들이 소년과 부친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둘러앉아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담담하고 꼿꼿하게 어른들의 불의를 꾸짖었다. 그리고 만년필을 꺼내 창호지 반절지에 세로글씨로 ‘저희들은 나라에서 노임으로 지급한 돈을 허위 장부를 만들어 품값을 횡령했습니다. 차후 횡령한 돈 전액을 마을 사람들에게 노임으로 되돌려 줄 것을 각서하고 앞으로 마을과 나라를 위해 정직하고 바르게 모범이 되는 일을 할 것을 서약합니다’라고 작성했다. 그 아래에는 각자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으라고 요구했다. 9명의 무릎 꿇은 어른들은 14살 소년 앞에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연대 각서를 날인했다. 서명하는 어른들의 손가락이 떨렸다. 소년의 부친은 넋을 놓고 말없이 앉아 계셨다. 형사 두 명이 그 연대 각서를 들고 경찰서로 돌아간 뒤, 9명의 어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용서를 빌고 소년과 부친의 앞을 뒷걸음질 쳐나갔다. 그날 밤, 소년은 밤새도록 부친으로부터 마을에 몹쓸 짓을 했다는 질책과 호령을 듣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뒤로 이장과 공모에 가담했던 9명의 부도덕한 어른들은 각서한 내용대로 횡령한 액수를 전액 마을 사람들에게 노임으로 환급했다. 이장 L씨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도박과 부정한 일에서 멀어졌고 마을은 화평을 되찾았다.

그 뒤로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소년은 언론의 길을 걸어 대기자(大記者)가 됐다. 그 시절 불의와 부정 앞에 꼿꼿이 맞섰던 소년의 40년 뒤 자화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때로는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온 40년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었으니 삶의 영혼과 신체에서 얼마나 악취가 풍겨날 것인가. 사뭇 우리가 살아온 삶에 숙연히 고개 숙여 회개하고, 썩고 부패한 오물의 악취를 풍기는 인간으로 변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며, 새해에는 훈훈한 인간의 향기를 뿜어내 심성이 메마르고 황폐해진 사회에 한 줄기 희망을 안겨 줄 수 있는 인간이 되기를 자중해 본다.

새해 병술(丙戌)년 개띠 해의 벽두(碧頭)에, 이 사회와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꿀벌과 개미처럼 묵묵히 자신의 일을 땀 흘려 일구는 가운데도 ‘정직과 정의’가 스며들게 해 정치권을 일깨우고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주문한다. ‘무사는 정신이 죽으면 검을 잡을 수 없고 언론인은 영혼이 죽으면 펜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새해에는 우리의 영혼에 불을 지펴 생동케 하자.

허성호 대기자

허성호  webmaster@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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