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애숲길 8곳 중 5곳은 휠체어 접근 불가
교통약자와 생태계 고려한 무장애숲길 설치 기준 시급
[환경일보] 풀씨행동연구소는 11일 보도자료를 통해 관악산, 불암산, 아차산, 대모산, 능골산, 봉산, 안산, 북한산 총 8개 지역의 무장애숲길 시민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했다.
무장애숲길 8곳 중 5곳은 공원 입구까지 경사가 심하거나 계단이 있어서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했으며, 4곳은 차도와 분리된 보행자 접근로가 없었다.
무장애숲길은 장애인 및 노약자 등 보행약자들도 부담 없이 산을 즐길 수 있도록 전 구간 경사도를 8% 미만으로 만든 완만한 데크형 숲길을 말한다.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숲을 일부 훼손하면서 넓은 면적을 할애했지만, 정작 장애인은 이용하기에 어려운 숲길이 조성된 것이다.
시민모니터링 결과 장애인 이용 측면에서 ▷8곳 중 5곳은 공원 입구까지 심한 경사 및 계단이 존재 ▷4곳은 인근 지역에서 무장애숲길 입구까지 차도와 분리된 보행자 접근로가 없음 ▷8곳 모두 안내판에 탐방로 경사도, 난이도, 장애인 화장실, 휠체어 선회 가능 위치 안내가 없음 ▷8곳 모두 탐방로에 대해 점자·음성 안내 없음 ▷7곳이 교통약자가 참여가능한 숲체험 프로그램 운영 없음 등이 확인됐다.
또한 식생 훼손과 관련해서는 노선 안팎 벌목과 가지치기, 데크 조성 시 수목보호홀을 만들어 존치한 수목이 성장하면서 기둥이 융기한 사례가 7곳에서 다수 발견됐고, 토양훼손으로 인한 수목뿌리노출 5곳, 과도한 숲길 분기점으로 인한 훼손이 4곳, 데크길 주변으로 끈끈이 트랩을 설치해 생태를 훼손한 사례도 1곳에서 확인됐다.
장애인 이용과 식생 훼손 두 가지 측면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지역은 은평구 봉산이었다.
봉산 무장애숲길 코스는 총 2곳으로 각각 수국사와 숭실고에서 출발하는데, 양쪽 모두 숲길 입구까지 차도와 분리된 보행자 접근로가 없고, 경사가 심한 편이었으며, 울퉁불퉁한 야자매트가 깔려있는 곳도 있어 휠체어가 지날 수 없는 환경이었다.
또한 장애인 화장실은 있지만, 입구 폭이 0.9m로 좁아 휠체어 진입이 어려웠으며, 안내판에 관련 정보 표시가 없어 정보접근성 측면에서도 열악한 수준을 보였다.
이뿐만 아니라 비탈면의 토양 흘러내림이나 난간에 끼인 나무, 노선 안팎에 벌목된 나무가 산재했으며, 전체 숲길을 따라 끈끈이트랩이 설치되는 등 생태적으로도 훼손이 가장 심각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관악구 관악산은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산림치유 프로그램이 상시 운영 중이었고, 서대문구 북한산 무장애숲길은 상대적으로 숲 훼손이 덜한 사례로 평가됐다.
이윤주 풀씨행동연구소 캠페이너는 “다양한 교통약자의 접근성을 고려하되, 과도한 생태 훼손이 일어나지 않는 무장애숲길 설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생태적 측면에서 기존에 있던 길에 부분적으로 데크길을 잇는 형태로 생태 훼손 최소화, 정기적인 관리계획 수립을 통한 수목 보호 조치, 안전 및 생태훼손 문제가 있는 데크길은 철거 고려를 제안했다.
또한 이용 측면에서 계획~이용 과정의 장애인 당사자 모니터링 절차 도입, 숲길 안내판에 장애인 이용가능 시설표시 스티커 붙이기, 휠체어 이용자 눈높이를 고려한 전망 데크 난간 교체 등의 아이디어가 도출됐고 밝혔다.
모니터링 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자문한 전윤선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대표는 “굳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 숲을 훼손하기보다 일부 구간은 경사가 조금 있더라도 기존 길을 평탄화해 활용하면 된다. 정보 접근성을 개선하고, 숲길 신규조성보다도 휠체어 이용자에 위험한 단차를 없애는 세심한 노력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길은 유아차나 노약자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어 결국 모두를 위해 좋은 길이 된다”는 게 전 대표의 제언이다.
이 캠페이너는 지난 10여 년간 서울의 산림에 무장애데크길은 39곳이나 조성됐지만, 배리어프리 (예비)인증을 받은 평지형 공원은 19곳에 불과한 불균형을 지적하며, “단숨에 바뀌지 않겠지만, 이동권과 생태를 함께 고민하는 시민들이 있다는 걸 계속 알리고 의견을 전달하자”고 제안했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굳이 기존 등산로 옆에 새로운 길을 또 만들어야 했나”라며, 과도한 길 조성에 대한 문제의식에 공감했다.
불암산 모니터링에 참여한 이주원(노원구)씨는 지자체는 예산을 마련한 이상 반대의견이 나와도 계획대로 하려고 하고, 한 군데서 하면 ‘저기도 했으니까 우리도 한다’는 식으로 지자체간 경쟁적인 사업을 한다. 예산이나 사업계획이 적정하게 이뤄지기보다 실적 위주로 진행되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아차산 모니터링에 참여한 조주연(광진구)씨는 “수목보호홀에 끼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는 나무가 너무 많아서 기록하기를 멈췄을 정도”라면서 무장애숲길이 다양한 교통약자는 물론 동식물과도 공존가능한 공간으로 기획되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또한 “모니터링 전에는 모두가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좋은 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기준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장애인을 제외하고 모두가 편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경사도만 평탄하게 낮추었을 뿐 다양한 교통약자에게 필요한 정보나 동선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봉산 모니터링에 참여한 김송희(은평구)씨는 “무장애데크길을 걷다 보면 몸은 편하지만, 내가 숲에 온 건지 모르겠고 금세 지루해진다”며, “사람들은 길만 걷기 위해 숲에 가지 않는데, 각각의 숲이 가진 다양한 지형 특성과 자연 요소를 고려하지 못한 천편일률적인 데크길은 사람들이 숲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도 쪼그라들게 한다”며, “오히려 관에서 예산을 쓴다면 하드웨어보다는 동네숲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아는 지역주민과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해 장애인, 비장애인이 통합적으로 숲을 경험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 좋겠다”는 새로운 의견도 제시했다.
풀씨행동연구소는 지난 6월 한 달 동안 ‘지속가능한 도시숲을 위한 무장애숲길 시민모니터링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교통약자 이동권 확대 필요성과 데크길 조성으로 인한 산림 생태계 훼손 우려에 공감하는 시민 11명이 참여했다.
이번 모니터링은 이용, 훼손, 복원 세 가지 카테고리를 기준으로 체크리스트와 GPS앱을 활용해 이뤄졌으며, 시민 모니터링단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조만간 서울시 관련 부서에 제안사항을 전달할 계획이다.
서울에서는 지난 2009년 안산 자락길을 시작으로 2023년 상반기까지 총 39개소(67.6㎞)가 조성됐다. 서울시는 장애인·노약자·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과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을 준용하여 유효폭, 기울기, 핸드레일 등을 설치해 왔으나, 경사가 심하고 자연성이 높은 산림에 적합한 별도 설치 기준이 없어 산림훼손 우려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