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 생명의 백업, 씨앗을 지키는 요새
북극의 시드볼트부터 동네의 씨앗도서관까지
환경부와 에코나우는 생물자원 보전 인식제고를 위한 홍보를 실시함으로써 ‘생물다양성 및 생물자원 보전’에 대한 대국민 인지도를 향상시키고 정책 추진의 효율성을 위해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을 운영하고 있다. 고등학생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선발된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매월 선정된 기사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녹색기자단=환경일보] 송채원 학생기자 = 당연하게 먹는 밥 한 끼, 당연하게 피어나는 꽃 한 송이. 하지만 이 ‘당연함’을 가능케 하는 건 아주 작고 단단한 존재, 씨앗이다. 기후변화, 전쟁, 질병 등 위기의 시대 속에서 인류는 어느 때보다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 준비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조용히, 철저히 진행되어 왔다. 바로 지구 최북단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에 위치한 ‘시드볼트(Seed Vault)’, 일명 ‘최후의 방주’를 통해서다. 이 거대한 저장고에는 인류가 지켜야 할 생명의 기원, 씨앗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생물다양성 보전의 최전선에서 인류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최후의 방주, 시드볼트를 파헤치다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 롱이어비엔(Longyearbyen) 근처, 북극권에서 약 1,300km 떨어진 산속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씨앗 저장고,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영하 18도의 영구 동토층 안에 위치해 있어 냉각 에너지 없이도 자연적으로 낮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2008년 개장 이래, 전 세계 100여개국으로부터 기탁 받은 100만 종 이상의 씨앗들이 이곳에서 ‘생명의 백업’으로 보관되고 있다. 놀랍게도, 시드볼트는 단지 상징적인 공간이 아니다. 실제로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알레포에 있던 국제식물유전자원연구소(ICARDA)가 파괴되었을 때, 이들은 시드볼트에 보관된 종자를 회수해 레바논에서 다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 자연재해, 질병 등으로 특정 품종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할 때 시드볼트는 생물다양성을 복원할 수 있는 마지막 생명줄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물 다양성과 식량안보
씨앗은 단순히 식물의 시작뿐만이 아니다. 하나의 씨앗 안에는 유전적 다양성, 문화적 역사, 지역 생태계의 균형, 그리고 식량 안보에 이르는 방대한 가치가 담겨 있다. 생물다양성은 ‘희귀 동식물 보호’ 그 이상의 이야기이다. 단일 품종에 의존한 농업은 병충해나 기후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 184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감자 한 품종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농업 시스템은 곰팡이성 역병 한 번에 무너졌고, 수백만 명이 굶주리거나 이민을 떠났다. 씨앗의 다양성은 곧 인류 생존 방법의 다양성이며, 생태계 붕괴 예방의 대책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지키는 저장고가 바로 시드볼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대한민국도 이 국제적인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은 2010년부터 시드볼트에 약 4,000여 종의 고유 작물 유전자원을 기탁하며 한국의 생물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씨앗을 지키는 일은 정부나 과학자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식탁, 화단, 텃밭에서부터 씨앗의 다양성을 실천할 수 있다.
그 예로, ‘씨앗 도서관’이 있다. 말 그대로 책처럼 씨앗을 빌려주는 도서관이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토종 씨앗을 대여해 직접 재배하고, 수확한 씨앗을 다시 도서관에 반납하는 순환 구조를 이룬다. 서울, 대구, 전주, 완주 등 전국 곳곳의 공공도서관이나 마을 커뮤니티에서 운영되는 씨앗 도서관은 단순한 원예 활동을 넘어, 사라져가는 토종 품종을 보전하고 생물 다양성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체감하게 하는 시민 플랫폼이다. 한 줌의 토종 참깨, 수미 감자, 방울토마토 씨앗에는 단지 식물이 아닌 한 지역의 기억과 문화가 담겨 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지키는 자’로서 감당해야 할 생물 다양성의 책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현대인으로서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저장하고, 복원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의 유전정보는 단 한 번의 실수나 무관심으로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시드볼트는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기 위한, 그리고 우리가 다시 책임을 자각하기 위한 상징적 공간이다. 지구에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생물 다양성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조건이며, 씨앗은 그 조건을 지키기 위한 우리 모두의 연대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