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익 변호사의 ‘정·비·공’ ⓾]
‘기후변화의 심리학’을 읽고: 행동하는 마음을 설계하라
황성익 파트너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
[환경일보] 조지 마셜의 ‘기후변화의 심리학’을 읽는다. 이 책은 우리가 왜 행동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의 초점을 기술이나 경제가 아닌, 우리 마음의 작동 방식으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문제작이다.
마셜의 진단은 명쾌하고 때로는 불편할 정도로 정확하다. 우리의 뇌는 포식자의 습격처럼 즉각적이고, 가시적이며, 명확한 적이 있는 위협에는 기민하게 반응하도록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했지만 기후위기처럼 느리고, 추상적이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분명하고, 그 영향이 수십 년 뒤에나 본격화되는, 우리 뇌의 경보 시스템을 완벽하게 우회하는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에는 둔감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마셜은 수많은 인지 편향과 사회적 본능이 어떻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행동을 주저하게 만드는지 낱낱이 파헤친다. 먼 미래의 불확실한 손실보다 당장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현재 편향’, 나와 생각이 같은 집단의 의견만 믿으려는 ‘확증 편향’과 ‘부족주의’, 그리고 모두가 침묵할 때 나 역시 침묵하게 되는 ‘방관자 효과’까지. 그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지난 수십 년간의 과학적 경고가 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공허한 메아리에 그쳤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었다.
책임의 딜레마: 타고난 결함인가, 탐욕의 시스템인가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날카로운 질문이 제기된다. 기후 무대응의 원인을 보편적 인간 심리에서 찾는 것은, 위기를 조장하고 유지해 온 구조적 책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닐까? 비평가들은 진짜 적은 우리의 뇌가 아니라 끝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 최전선에 선 화석연료 산업, 즉 명백한 ‘탄소 악당’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들 산업은 인간의 심리적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허위 정보 캠페인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며 의도적으로 불확실성을 증폭시켜 왔다. 소비자 자본주의는 미래보다 현재의 만족을 극대화하려는 우리의 ‘현재 편향’을 부추기며 과소비를 미덕으로 만들었다.
결국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 위기는 우리 모두가 공범인 심리적 비극인가, 아니면 명확한 가해자가 존재하는 구조적 문제인가? 마셜의 책이 갖는 진정한 가치는 이 이분법을 넘어서는 데 있다. 그는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라는 소모적인 질문에서 ‘우리의 행동 유도 전략은 왜 계속 실패하는가’라는 근본적이고 해결 지향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마셜은 비난과 위협에 기반한 전략의 실패를 심리학적으로 냉철하게 해부한다. ‘적 만들기’ 서사는 듣기에는 통쾌하지만,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켜 문제 해결에 필수적인 광범위한 연대를 구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개인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캠페인은 ‘도덕적 허가’(작은 선행으로 더 큰 소비를 정당화하는 심리)나 분노 같은 예측 가능한 방어기제를 촉발할 뿐, 지속적인 행동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책임의 할당은 엄정해야 하지만, 비난과 위협만으로는 복잡하고 완고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비난을 넘어: 행동을 설계하는 심리학의 지혜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마셜은 비난 대신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을 설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첫째,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바꿔야 한다. 사람들은 사실관계보다 자신의 ‘부족’에 속한, 신뢰하는 사람의 말에 훨씬 더 강력하게 반응한다. 마셜이 설립한 기관 클라이밋 아웃리치가 영국에서 진행한 ‘브리튼 토크 클라이밋(Britain Talks Climate)’ 캠페인은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사회 집단별로 각기 다른 신뢰받는 메신저를 내세웠다. 과학자나 환경운동가만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과 공동체의 리더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가치를 연결해야 한다. 기후위기를 ‘환경’이라는 좁은 상자에 가두는 순간, 대중은 이를 고용, 경제, 안보 같은 더 시급한 문제의 뒷전으로 미루게 된다. 클라이밋 아웃리치는 영국 노동조합과 협력하며 에너지 절약을 ‘친환경 라이프스타일’이 아닌 ‘노동 조건 개선’과 ‘임금 협상력 강화’라는 그들의 핵심 가치와 연결해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기후 행동을 애국, 자녀 보호, 공동체 수호와 같은 각 집단의 ‘신성한 가치’와 연결할 때,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협상 불가능한 도덕적 의무가 된다.
셋째, 참여의 장을 열어야 한다. 일방적인 정보 전달과 계몽을 넘어, 시민들이 해결책을 공동으로 창조할 때 진정한 주인의식이 생긴다. 스코틀랜드의 시민 의회는 무작위로 추출된 시민들에게 기후 정책을 직접 설계할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정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지를 이끌어 냈다.
면죄부의 역설, 그리고 한국 사회의 과제
역설적이게도, ‘기후변화의 심리학’은 우리에게 불편하지 않은 책일 수 있다. 우리의 무관심과 회피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진화적으로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라 말하며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면죄부가 이 책의 가장 날카롭고 강력한 지점이다. ‘어쩔 수 없다’는 진단은, 이제 그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작동 방식을 이해했으니 훨씬 더 정교하고 섬세하게 정책과 사회 운동을 설계해야 한다는 더 무거운 책임으로 전환된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다.
기후위기는 제도와 심리, 구조와 마음을 동시에 직시해야 풀 수 있는 과제다. 심리학적 통찰이 구조적 책임을 면책해 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구조적 비판 역시 인간 마음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공허한 외침에 그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이미 2050 탄소중립을 법제화했고 ESG 공시 의무화를 앞두고 있지만, 시민들의 마음은 따라오지 못하는 ‘인지적 부조화’가 현재진행형이다. 시민들의 심리적 수용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당위와 규제만으로 정책을 밀어붙일 수 없다. ‘희생’을 강요하는 대신 ‘참여’의 즐거움을 설계하고, ‘비난’ 대신 ‘공감’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중앙 정부의 선언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부터, 지역에서부터, 작은 곳에서부터, 구체적인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