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변해야 산다

우리 사회에서 치유라는 말은 흔히 여성들만의 전유물인 듯 여겨진다. 그만큼 남자가 자신의 상처를 발설하는 것은 ‘강한 남성상’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남다른 삶의 경험을 가졌다고 하기 어려운 우리 시대 보통의 중년 남성이다. 한때 삶에 대한 두려움에 죽음까지 생각했다고 하나, 따지고 보면 살면서 그런 충동을 한 번 이상 느끼지 않은 이가 또 몇 명이나 있겠나. 남보다 몸이 약하고 남보다 섬세하고 남보다 덜 권위적이라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그도 우리 둘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이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삶, 가족들과의 소통에서 겪는 문제, 삶에 대한 자신감 결여는 현대사회의 남성들이 겪는 일반적인 문제다. ‘치유’의 관점에서 한 남성의 삶을 정리한 이 책은, 그 누구도 발설하기 주저하는 남성들의 내면에 웅크린 상처와 치부를 섬세한 필치로 가감 없이 드러낸다. 저자는 자기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그림자와 경쟁을 부추겨온 교육, 그리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로 형성된 경직된 몸과 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치유를 시작하였다. 저자의 경험은, 그 과정을 올바로 거칠 때에만 사회에서 원하는 남성상으로 자신을 옭아매지 않고 ‘자기다운 길’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몸의 감각을 회복하라

치유라고 하면 흔히 심리 치유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마음이 아니라 몸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몸의 요구를 정직하게 따르라는 것이다. 도시 생활에서는 마음대로 몸을 부리기에 몸이 가진 자연적인 리듬이 왜곡된다. 게다가 몸 쓸 일이 없으니 감각이 둔해질 수밖에 없다. ‘몸 살림’의 시작은 이렇듯 잃어버린 몸의 감각을 되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먹고 자고 싸는 것은 삶의 기본이다. 이를 잘할 때 오는 만족감을 저자는 ‘원초적 행복’이라 한다. 원초적으로 행복하다면 살면서 어떤 불행을 겪어도 그만큼 회복이 빠를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 역시 도시에서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논밭을 사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몸이 회복되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눈이 떠지면 일어나는 자연적인 몸의 리듬에 따르니 몸이 살아났다고 한다.
‘몸 살림’은 저자에게 다양한 경험을 안겨 준다. 자기 안에 잠자고 있던 또 다른 반쪽이 꿈틀한 것이다. 감각이 살아나니 입맛이 돌며 ‘요리’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리듬을 타고 자연스럽게 몸을 들썩일 정도로 잠자고 있던 ‘댄스 본능’이 깨어나거나, 몸 안에 꾹꾹 눌러 담아둔 이야기가 기지개를 켜고 입 밖으로 나오는 신기한 경험. 이 모두 몸 치유의 선물이었다.

마음 치유는 자존감 회복에서 시작된다

몸의 회복은 마음의 건강성을 되찾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치유의 두 번째 단계는 자존감 회복이다. 저자는 온몸을 움직여 양식을 얻고, 자기 안에 내재한 힘을 확인하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의 능력은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로 가늠된다. 늘 아내보다 돈벌이를 못하는 남편이라는 생각에 누구보다 돈에 주눅이 많이 들었던 저자는 농사를 짓고 돈을 쓰지 않는 자급자족의 삶을 실험하고, 몸을 부려서 번 돈을 다시 자기 몸에 투자하는 삶을 실천하면서 돈에 대한 억압에서 조금씩 놓여난다. 그렇게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한 일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잃어버린 자리를 찾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소통하는 길을 찾다

뒤틀린 관계의 회복은 몸과 마음의 치유가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사회가 변했다고는 하나 우리 사회에서 양육은 여전히 여자 몫이다. 저자의 경험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도시에서 양육은 당연히 아내 몫. 그러니 아이들과 아내의 관계 속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기회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골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의 학교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아내를 통해 듣던 교육 문제를 아이 입에서 직접 듣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저자는 손 놓고 있던 아이들 양육에 관심을 갖게 된다. ‘소통’의 절실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거나, 소소한 집안일을 온 가족이 나누고, 나아가 집 짓는 과정까지 함께하면서 아이들과의 신뢰를 회복한다. 아내와의 관계 회복 이야기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결혼한 지 20년이 넘은 저자는 아내와 살뜰한 말 한 마디, 그윽한 눈길 한번 오가지 않아도 사는 데 큰 불편이 없는 중년 남자다. 게다가 지난 10년간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문제나 아이들 교육 문제로 부부 사이의 힘겨루기나 권력 투쟁을 치열하다 못해 격렬하게 했을 정도이다. 그러던 이들 부부에게 새로운 바람이 분다. 바로 ‘부부 싸움’할 에너지를 ‘부부 연애’로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고, 투정하듯 아내의 위로를 원한다든지, 아내의 좋은 점을 닮으려고 하는 저자의 모습은 난생처음 연애를 시작하는 소년의 그것처럼 풋풋하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닭살 돋는’ 중년 부부의 연애담은 책 읽는 재미를 더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라

자기를 보듬고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 저자의 자기 치유는 이웃에 대한 시각도 바꾸어 놓는다. ‘소통’이 잘 된다면 물리적인 거리도,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상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막내아들로 직접 치매 어머니를 모시는 이웃의 모습을 통해서도, 새끼가 독립생활을 할 수 있을 때 자기 영역을 물려주고 떠나는 어미 고양이의 모습을 통해서도 저자는 많은 것을 배운다. 저자는 제 자식 사랑에서 못 벗어나는 팔불출이 되기보다 좀 더 많은 아이들의 ‘사회적 아버지 되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내’가 못하는 아버지 노릇을 이웃이 대신해줄 때도 있고, 이웃이 못하는 부분을 ‘내’가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억압이 되는 것은 시간과 돈이다.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삶, 돈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일에 대한 시각 바꾸기 등 저자는 치유를 통해 새로운 사유를 전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우리 사회의 근본이 무엇인지, 어떻게 새로운 삶을 찾을 것인지에 대한 저자의 고민은, 압박감과 박탈감을 원죄처럼 안고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남성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저자 소개

김광화

저자는 1957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고, 한양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청소년노동자를 위한 부천실업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996년, 20년 가까운 서울 생활을 어렵사리 정리하고 경남 산청으로 내려가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간디공동체를 꾸렸다. 그로부터 2년 후 무주로 귀농해서 지금은 전망 좋은 산기슭에 손수 흙집을 지어 살고 있다.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는 틈틈이 굴렁쇠, 귀농통문, 웰빙라이프, 신동아 등에 농사, 교육, 부부 연애, 치유에 관한 글을 연재했다.
‘정농회’ 회원으로 가족은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 1988년생 딸과 1995년생 아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부모와 함께 일하고 공부한다. 아내 장영란과 지은 ‘아이들은 자연이다’는 자연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 에세이다. 요즘은 결혼 후 20년 만에 다시 아내와 연애하는 데 관심이 많다. 연애 감정이 무르익을 무렵, 아내가 쓴 글에 사진을 찍어 부부가 함께 낸 책이 ‘자연 그대로 먹어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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