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규 박사
기존에 사용된 3만8천 종 알려진 정보 거의 없어

세계적 규제강화 속 숨은 의도는 무역장벽화

 

전 세계에 유통되는 화학물질 수는 10만여 종에 달하고 우리나라에서도 4만3천여 종의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으며 매년 400여 종의 신규물질이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이미 유통되고 있거나 새로이 출시되는 화학물질은 종류와 용도, 성분 등에 따라 다양한 법률로 관리되고 있다. 현재 환경부 ‘유해화학물질관리법’, 고용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법’ 등 7개 부처의 14개 법률이 존재하며 다양한 법률 중에서 산업용 화학물질의 심사 및 유해물질의 안전관리를 담당하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이 우리나라 화학물질 관리의 대표적인 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91년 2월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이하 유해법)’이 제정된 이후부터 국내에 수입되거나 제조되는 새로운 화학물질, 즉 신규화학물질에 대해 화학물질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기업은 신규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생산해 유해성 심사를 신청하고 정부는 이를 검토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신규화학물질의 유해성 심사를 통해 정보가 확인된 물질은 현재 6천여 종에 불과하며 과거부터 심사를 거치지 않고 사용됐던 나머지 기존화학물질 3만8천여 종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로 떠올라 2002년 남아공에서 개최된 세계지속가능발전정상회의에서는 ‘2020년까지 사전예방원칙에 따라 화학물질의 위해성 평가와 관리를 수행’하자는 국제화학물질관리전략(SAICM)이 채택된 바 있다. 국제적인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포괄적인 추진전략의 이행을 위해 EU의 REACH 제도 시행, 일본의 ‘화학물질 제조 및 심사 등의 규제에 관한 법률’ 개정, 중국의 ‘신화학물질신고지남’ 제정, 미국의 유해물질관리법 개정 추진 등 주요 국가들이 화학물질 관리제도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도 이러한 국제적인 화학물질 관리제도 개선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환경부는 ‘SAICM 국가 이행계획수립(2010)’과 ‘한국형 REACH 제도 도입방안 연구(2010)’ 등을 수행했으며 이들 연구결과를 토대로 선진국형 화학물질 관리제도 도입을 위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 제정안을 도출해 입법화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의 유해법상에서도 취급제한·금지물질 제도가 있으나 위해성 평가결과를 통해 지정하기보다는 국제적인 금지물질이나 외국의 금지물질, 유독물 중에서 독성이 높아 사용을 금지해야 하는 물질 등을 주로 지정함으로써 국제적인 수준에 뒤떨어진 제도로 인식됐다. 이를 화평법에서는 물질의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출을 고려한 위해성 평가결과에 따라 제한·금지물질을 지정하고 이 과정에서 이해관계자의 의견수렴을 거치는 절차를 신설한 것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의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화학물질 관리 분야가 질적·양적으로 많은 발전을 해 왔지만 여전히 선진국 수준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보다 20여년 먼저 화학물질 관리를 시작한 EU 등은 21세기 들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책변화를 꾀하고 있다. EU REACH라는 신화학물질 관리정책은 안전성에 대한 검증 없이 사용하던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산업체가 스스로 물질의 위해성 정보를 생산해 등록하고 정부는 이를 평가해 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행 초기에는 강력한 화학물질 규제라는 산업체의 불만과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사회적 불신도 있었으나 이제는 중국, 일본, 미국 등 다른 국가들도 화학물질 관리정책을 REACH 수준으로 강화했거나 준비하고 있다. 이들 움직임은 단순히 자국 내 화학물질 관리수준을 향상시켜 국민을 건강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 외에 화학물질 규제를 무역장벽화 하려는 숨은 의도도 있다. 우리나라만 유해법상의 화학물질 관리 수준을 고수한다면 이는 EU나 중국 등 높은 규제 장벽이 있는 국가로 유입되지 못한 유해화학물질들이 제도 수준이 낮은 우리나라로 아무런 제재 없이 들어올 수 있어 국내 기업들에 무역 역차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장 산업체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현 상태의 화학물질 관리 정책을 유지한다면 장기적으로는 국민건강 및 환경보호 측면은 물론 산업체의 국제적 경쟁력 차원에서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산업체는 그동안 화학물질 정보 생산을 주도해 온 정부에 무임승차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화평법에 의한 새로운 화학물질 관리제도에서는 주체적이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법 시행에 대해 미리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부는 제도의 입법화에 따라 산업체의 부담을 완화해주는 여러 지원책을 마련해야 하며 추후 하위법령 제정에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산업체를 위시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수렴을 거쳐 사회적으로 충분히 합의된 수준의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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