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드라마 통해 삶의 존경심 표현

600년전 환경 문헌으로 남아 있어

역사드라마 작가로서 이룬 그의 업적은 독보적인 존재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역사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의 역사소설이나 역사드라마가 끈질기게 추구하는 역사는 단지 지나간 과거만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맥락’이라는 역사인식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역사에서 환경이 600년 전에도 확실히 있었다는 것 아시나?” 글쎄요 옛날이야 환경이 깨끗했을 테니까 보호가 따로 있었을까요? 대뜸 환경전문기자라는 사람이 그것도 모른다며 핀잔이 날아든다.
조선 초기 정도전의 삼봉집에 보면 ‘여름산에 도끼를 가진 사람을 못 올라가게 하고 그물코가 작은 그물을 강물에 던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처럼 확실한 환경보호가 또 있겠나 그 옛날 환경보호 사상이 문헌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예는 아주 드문 일이란 말이지. 기자가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이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자 친절한 해설이 곁들여졌다. “겨울산에서는 나무를 벨 수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지? 왜 그렇겠어 여름에 물오르는 나무는 베지 말아야 한다는 것 때문이고 그물코가 작은 그물을 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어린 새끼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지 오늘날 산란기때 어로행위 못하게 하는 것과 같아 자연의 순리대로 살면 그게 바로 환경보호야. 자연의 순리를 거슬렀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환경이 어렵게 된 거 아니겠나”.
참으로 맞는 말이어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는 1957년 문예지“현대문학”에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의 추천으로 시 <이슬>을 발표하면서 글 쓰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1961년 동지에 조연현(趙演鉉)의 추천으로 문학평론 <現代詩의 生成과 理解>가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창작생활을 시작, 1961년 국방부에서 주최한 시나리오 <두고 온 山河>가 현상모집에 당선되면서 극작(劇作)에 전념하게 된다.
극영화의 시나리오 <갯마을·1965>,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산불·1967>, <봄·봄·1969>, <李箱의 날개·1968>, <독 짓는 늙은이·1969>, <세종대왕·1978>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학작품의 영상화를 주도하면서 한국영화의 국제화에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통사극(正統史劇)의 틀을 세우는 등 정사(正史)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때문에 1983년부터 1990년까지 장장 8년 동안 MBC-TV를 통해 방영된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5백년>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내용을 충실히 극화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우리 민족의 외경심(畏敬心), 그리고 국사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대한문·1978>을 비롯한 <풍운·1982>, <찬란한 여명·1996> 등은 개화기 선각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 각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정통사극 드라마작가로서 길을 걸어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역사드라마를 쓸 수 있는 기반이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개척하는 개척자가 되어야 했다. 방대한 실록과 그것보다 더 많은 수많은 문집을 보면서 씨름하는 세월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방송이나 고공매체에서 일제시대의 잔재나 우리말을 함부로 쓰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꼭 참견(?)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지금 후배들이 쓰는 역사드라마가 어떠냐고 슬쩍 운을 떼자 의외다 싶을 정도로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역사를 다루는 드라마 작가는 젊은이들이 역사의식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할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 선조들의 생활을 통해 삶의 존경심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은 덧붙였다.
분야는 다르지만 글 밥을 먹는 사람이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우러러보는 대작가를 표현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 시인·극작가·소설가. 호는 초당(草堂), 혹은 취영(翠影)을 쓴다.
1933년 5월 23일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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