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애국투사인 (사)구파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회장 박기수)는 백의사 순국 제73주기를 맞아 5일 구파백정기의사기념관 의열사 광장에서 추모행사를 가졌다.

이번 행사에서는 헌화 및 분향 등 기념식을 비롯 전시관 및 홍보영상물 관람과 함께 어린이 백일장 및 사생대회도 열렸다.

백의사는 1933년 중국 상해에서 일본 주중공사 아리요시아끼의 암살을 시도하다가 피체돼 1934년 6월 5일 일본 나가시키현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순국한 항일애국투사.

1896년 1월 19일 부안읍 신운리에서 출생, 소년시절 현 영원면 은선리로 이주했다.

백의사는 1914년 일본경찰 폭행을 시작으로 항일애국활동에 나서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직접행동을 결의하고 동지를 모아 자금 모금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21년 일본에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독립운동노선을 택한 뒤 1924년 중국에서 결성된 ‘재중국조성무정부주의 연명’에 참여하고, 1928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일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에는 ‘한족총연합회’의 일원이 되는 등 아나키스트로서 활동도 전개했다.

백의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1931년에는 ‘항일구국연맹’산하 비밀결사단체인 ‘흑색공포단’의 행동책임자로써 막중한 소임을 다하고 일본 군수물자수송선과 천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대일 결사항전에 돌입했다.

특히 1933년 일본공사 아리요시아끼가 일본군 수뇌와 중국 친일 고관들을 모아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요리집에서 주연을 연다는 정보를 입수, 이를 타도하고 암살하고자 했던 ‘육삼정 의거’를 도모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백의사의 살신성인적인 희생으로 중국 내 항일세력이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등 동아시아 판도내의 국제관계 변화를 가져오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육삼정 의거의 실패로 일제에 붙잡힌 백의사는 1933년 일본 나가사키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오랜 지병으로 인해 39살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조국광복 후 1946년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골이 봉환되고 국민장을 거쳐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고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정읍시는 이같은 백의사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6년 (사)구파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를 결성, 백정기의사기념관을 비롯한 백정기의사유적지 조성사업을 시작, 2004년 6월 5일 기념관을 개관하고,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이곳은 매년 6월 5일 추모제를, 그리고 8월 15일에는 광복절행사가 개최되고 시민을 대상으로 사회문화예술교육 등이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청소년을 대상의 ‘신독립운동’ 역사캠프도 가질 예정이다.

<강남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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