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을 조종해 온 진보 사상

이 책은 오랫동안 인간의 머릿속을 재배해 온 한 견고한 환상의 발전 과정과 종말을 다루고 있다. 세상만물은 느리지만 끊임없이 더 나은 쪽으로 진보해 간다는 믿음이 바로 그 환상의 실체다. 그 옛날 우리의 조상이 돌도끼를 들고 짐승을 사냥하던 시절과 현재의 우리 모습을 비교해 보면 분명 우리는 그들에 비해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발전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놀라운 진보를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조상에 비해 훨씬 더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분명한 어조로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돌도끼로 짐승을 사냥하던 것을 좀더 현대화된 시설에서 ‘우아하게’ 처리한다고 해서 우리의 실체가 고상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짐승과 식물들을 죽이고 있으며, 배설을 하고 교미를 한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친척인 오랑우탄의 모습은 과연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결코 오랑우탄보다 더 나은 존재가 아니며, 먼 옛날의 공룡보다도 더 발달한 존재라고 할 수도 없다.

이 책의 저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지구의 모든 변천 과정이 오로지 인간을 위해 진행되고 있다는 우리 인간의 터무니없는 환상을 과학철학과 생물학의 관점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원시 단세포 생물에서 출발한 지구상의 생물의 진화는 대략 40억 년 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출현으로 그 꽃을 피웠다.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고, 이성과 그 이성이 만들어 낸 과학기술의 힘으로 자연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을 생명 발전사의 중심에 놓고, 동시에 자신을 진화의 완성자로 보았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지구상에 출현했던 수많은 생명체들을 모두 진화의 부수물, 혹은 인간이 최고의 피조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전 단계로 만들었다.인간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지게 된 것은 바로 ‘진보 사상’이라는 커다란 환상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현재가 과거보다 나아졌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은 비단 진화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람들에게 그릇된 희망을 심어줌으로써 가장 크게 이익을 본 것이 바로 종교와 이데올로기다.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신과 정치 지도자에게 모든 의사결정권을 양도하게 하고 사람들의 두 눈과 귀를 막아버림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재보다는 장밋빛 미래를 현실로 착각하며 살도록 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기꺼이 ‘희망을 빼앗는 사람들’의 일원을 자처하며, 인류 사회에 뿌리 깊게 침투해 있는 그릇된 희망과 맹목적 이기심을 얘기하고 있다. 어설픈 희망을 품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비루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며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진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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