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환경일보】김석화 기자 = 강원도 원주시는 오는 11월 11일자로,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에 소재하고 있는 충효사(忠孝祠) 사당을 원주시 향토유적 제2009-3호로 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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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충효사

원주시는 국가나 강원도 차원의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못했으나, 원주 향토의 역사와 관련된 유적․유물 등을 지속적으로 보호·관리하기 위해 지난 2007년 12월14일 ‘원주시 향토유적 보호조례(조례 제765호)’를 제정했다.

 

이후 2008년 3월, 중앙문화재위원과 강원도문화재위원 및 전문학자 등으로 ‘원주시 향토유적 보호위원회’를 구성해 2008년 4월 23일자로 경순왕 영정을 모신 경천묘(敬天廟)와 운곡 원천석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창의사(彰義祠)를, 2009년 4월 30일자로 충렬사(忠烈祠)와 생육신 원호(元昊) 묘역(墓域)을 원주시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바 있다.

 

충효사(忠孝祠)는 황무진(黃戊辰, 1568~1652), 일명 황자룡(黃子龍)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아버지 황징(黃澄)과 어머니 원주(原州) 이씨(李氏) 사이에서 1568년 음력 3월 23일에 태어났고, 무진년(戊辰年)에 낳았다고 하여 이름을 무진(戊辰)이라고 했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어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겼고 기골이 장대했다.

 

임진왜란 때 군문(軍問)에 들어가 왜적의 장수를 사로잡은 공이 있어 황장사(黃壯士)라 불려졌고, 이러한 공으로 원주목사(原州牧使) 한준겸(韓浚謙)에 의해 병방(兵房)으로 발탁됐다. 효성이 지극하여 50리 길을 매일 어버이께 장국밥을 봉양했고, 100일째부터는 호랑이가 그를 태우고 다녔으니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송했다.

 

1608년 선조(宣祖)가 승하하시니 부모의 상사(喪事)와 같이 삼년상(三年喪)을 입었고, 이원익(李元翼), 임숙영(任叔英), 김세렴(金世濂)이 이러한 충의(忠義)를 찬양했다.

 

1610년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드렸고 5년을 더 살다가 돌아가자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섬겼다고 한다. 한준겸이 크게 감탄해 시를 지어 읊으니 김상용(金尙容), 김창일(金昌一), 이식(李植)이 차례로 공의 효행을 화답하였고, 이로부터 명현(名賢)들이 신분과 지위의 고하(高下)를 가리지 않고 교유했다.

 

1634년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1635년 중국 황제에게 알려져 소련(少連), 대련(大連), 황향(黃香)과 함께 사효(四孝)라 해 이련(二連), 이황(二黃)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650년 효종(孝宗)은 황효자의 이름을 자룡(子龍)이라 지어주고 절충장군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龍驤衛副司果) 벼슬을 하사했다. 이해에 양만고(楊萬古)와 오대산(五臺山), 설악산(雪嶽山), 금강산(金剛山) 등을 유람하고 돌아오니 사람들이 용담도인(龍潭道人)이라 불렀다. 1652년 음력 4월 22일 자녀와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천한 사람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고 돌아가니 85세였고 4남 4녀를 두었다. 시호를 충효(忠孝)라 내리고, 1653년 나라에서 다시 홍색(紅色)의 정문을 세우니 세상 사람들이, “살아서는 청정문이고 죽어서는 홍정문이다”하여 생청사홍(生靑死紅)이라고 칭송했다.

 

황효자를 봉안한 충효사(忠孝祠)는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골무내기 마을에 있다. 1704년에 건립됐고, 현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과 1994년 김충렬 박사가 글을 지은 ‘충효공(忠孝公) 황자룡(黃子龍) 정려비(旌閭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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