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면 기자회견.

▲올 1월 사망한 민모씨의 사례는 석면 피해자들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환경일보 김경태 기자]국회에 계류 중인 ‘석면피해구제법안’과 관련해 석면환자들과 시민단체 등이 법안의 조속한 통과와 유예기간 없는 즉각 시행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와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는 지난 18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속한 석면피해구제법 제정 등을 요구했다.

 

피해자들과 시민단체, 성명서 통해 주장

 

1970년대 중순부터 15년간 인천지역에서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해왔던 민모씨가 올해 1월29일 사망하면서 피해자들은 조속한 법안 통과를 촉구하고 나섰다. 민씨의 유족들은 “병원에서 아버지가 걸린 병이 석면 때문이라고 알려줬다”면서 “고인께서 병원비라도 지원받을지 모른다며 기대 하셨지만 돌연 악화 돼 돌아가셨다”라고 전했다.

 

민씨의 경우 발병 14개월 만에 사망했는데, 석면질환 가운데서도 중피종암의 생존기간은 평균 9개월에 불과해 조속한 법 제정 및 시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국회 환경노동삼임위를 통과한 석면피해구제법안은 여·야 대치로 인해 본회의에서조차 다뤄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석면 관련 환자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석면 광산이 있던 충남 홍성과 보령에서는 최근 들어 폐암환자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석면 광산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60대의 석면폐 환자 정지열씨는 “작년 석면 광산 인근주민들에 대한 확대조사과정에서 10여명의 폐암환자가 진단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병원측과 당국이 쉬쉬하고 있다”면서 “이런 환자들의 경우 조직검사를 통해 석면노출여부를 조사해야 하는데 사망해버리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다”며 추가환자 명단을 밝히고 공개적인 석면관련성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형선고 받고 죽을 날만 기다려

 

석면.

▲석면은 1급 발암물질임에도 그동안 제대로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2009년 국정감사장에 증인으로 출석해 “석면공장에서 일하다 암에 걸리면 산업재해로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공장밖에 살다 석면에 노출돼 병에 걸리면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석면의 환경성 피해문제 대책을 호소하던 악성중피종암환자 최형식씨는 “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린다. 국회가 만든다던 법이 자꾸 연기돼 자포자기 상태다”면서 “몇 푼이라도 보상을 받아 고생하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함을 덜어보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안되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해 충남 홍성과 보령지역의 석면 광산 주변마을 주민들에게서 대규모 석면피해질환이 공식 검진된 후 석면피해대책을 요구하는 여론에 밀려 2009년 1월 국회의원 81명에 의해 석면피해구제법안이 처음 발의된 후 3월까지 무려 4개의 유사법안이 여야를 망라하고 발의됐다.

 

작년 2월 임시국회와 9월 정기국회에서 여야 정쟁으로 2차례나 연기된 후 연말에 열린 임시국회에서야 겨우 여야가 인과관계증명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피해보상법’ 대신 긴급하게 지원할 수 있는 ‘피해구제법’을 택해 합의안을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법사위와 본회의가 열리지 못해 법안 통과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일본은 지난 2005년 6월 석면공장 주변주민들에게서 다수의 석면질환이 나타난 ‘구보타쇼크’를 겪은 후 불과 9개월 만에 피해구제법을 제정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특별법 형태인 ‘석면에 의한 건강피해의 구제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을 만들어 산재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악성중피종과 일부 석면 폐암에 대해 보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망자에 대해서는 유족에게 약 300만엔, 환자에 대해서는 치료비와 매월 약 10만엔의 건강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특히 사회보장이나 배상의 성격이 아닌 대부분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들에게 신속한 도움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환자의 치료나 유족들의 생계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법안이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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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에는 유아용 베이파우더와 화장품에까지 석면이

 검출돼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계류 중이어서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법안 통과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종사력 관계 없이 온 가족이 석면 피해

 

지난해 4월 발생한 유아용 베이비파우더와 화장품에 석면 탈크 검출 파동에 이어 충남 보성과 보령의 석면 광산 인근 주민 가운데 최소 110명 이상이 석면 관련 폐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국민들은 석면 공포에 휩싸였다. 이들은 종사력 유무에 관계 없이 석면에 장기간 노출돼 폐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정부조사 결과 드러났다.

 

광산 종사력에 관계 없이 95명에 대해 CT 촬영 등 정밀진단을 실시한 결과 석면폐(가능성 50% 이상) 55명, 흉막반 소견이 87명으로 조사됐다. ‘석면폐’란 폐의 간질에 석면섬유가 쌓여 생기는 진폐증이며, ‘흉막반’은 흉막 일부가 두꺼워진 상태를 말한다.

 

당시 환경부 관계자는 “석면작업이 광산에서만 이뤄진게 아니라 온가족의 생계수단인 만큼 집으로 가져와 작업했기 때문에 해당 가족들도 피해를 입은 것”이라며 “종사자와 비종사자로 구분 짓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다.

 

석면은 폐암, 악성 중피종 등의 질병을 유발하는 1급 발암물질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석면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최근 석면 광산이나 공장의 근로자와 주변 지역 주민 등의 석면으로 인한 건강피해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산업재해보상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피해자의 경우 보상제도가 미비하며, 석면으로 인한 질병은 대부분 10~40년 정도의 긴 잠복기를 거치기 때문에 상당수 근로자가 산업재해보상보험 소멸시효에 해당돼 보상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공사장.

▲최예용 집행위원장은 대규모 재개발과 리모델링으로 인해 석면노출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발병일 기준으로 지급 시기 정해야

 

현재 국회 계류 중인 석면피해구제법안에 대해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은 법 시행이 ‘제정 이후 1년 뒤부터’라는 점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석면질환자들의 다급한 사정을 감안해 일본의 경우 법 제정 이후 3개월 만에 시행한 사례를 볼 때 우리는 너무 늦다는 것이다. 게다가 악성 중피종암 환자의 경우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돼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다.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의 최예용 집행위원장은 “석면특별법이 환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하루빨리 시행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지급대상으로 확정되면 병이 발병한 날부터 요양급여가 지급되도록 ‘신청한 날’이 기준이 아닌 ‘발병한 날’을 기준으로 지급시기를 수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석면에 관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국회의원들은 앞다퉈 4개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환노위 통과 이후 석면특별법은 또다시 정쟁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환경부를 비롯한 중앙정부와 지자체 역시 각종 대책을 내놓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최 위원장은 “석면피해와 관련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대규모 재개발과 리모델링 등으로 석면노출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면서 “여러 부처에 흩어져서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석면관련 제도를 모으고 보완해 효과적인 석면대책을 시행토록 ‘석면안전관리법’과 관련기구설립 등도 시급한 과제다”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석면문제의 불편한 진실은 다 드러나지 않았으며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덧붙였다.

 

mindaddy@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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