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보 조은아 기자]《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도 기상·천문·지진에 대한 관측을 실시한 기록이 나와 있다. 이는 기상과 기후가 과거에도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 기상청(청장 조석준)은 국내 최초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상·천문·지진기록을 발췌해 한 권의 책으로 묶은 ‘한국 기상기록집’ 연작 중 1편을 발간해 우리 역사 문헌에 나타난 기상기록을 공개했다. <편집자주>

 

환일현상_기상청.

▲ 《삼국유사》에서 서기 766년(혜공왕 2년) “봄

정월에 해가 두 개나 나타났다”고 밝힌 것은 ‘환일

(幻日, parhelion)현상’으로 추정된다. 환일현상은

‘무리해’라고도 불리며 대기에 떠있는 미세한 얼음

조각이 태양빛에 굴절•반사돼 또 다른 태양이 떠있

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사진=기상청>

백제시대에는 누각전에 누각박사(漏刻博士)를 둬 물시계의 관측을 담당했고, 첨성대는 신라시대에 축조된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 24절기를 별을 통해 측정했다. 첨성대 이외에도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시계 혼천의,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들은 기상관측기구를 발명해 기상관측과 천문학에 병행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기상청이 발행한 ‘한국 기상기록집’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기상기록 424건, 천문기록 218건, 지진기록 88건이 수록돼 있고, 《삼국유사》에는 기상·천문·지진기록이 각각 8건, 5건, 2건 수록돼 있다. 이 중 대부분은 일상적인 것보다 특이현상을 중심으로 기록돼 있다. 예를 들면 ‘오로라’, 용오름 영향으로 추정되는 ‘물고기가 비에 섞여 있다’ 등 재미난 기상이야기도 볼 수 있다.

 

가뭄, 사람 잡아먹을 만큼 극심한 공포현상

 

기상현상 중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은 가뭄이었다. 그 다음에 눈, 서리, 기록이 많으며 그 외 홍수(큰 물)를 유발한 큰 비, 우박, 천둥 기록 등의 순이다. 천문기록 중에서는 일식이 가장 많고 그 외 혜성, 유성 등의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상기록 424건 중에는 ‘가뭄’이 112건(26.4%)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다. 당시 가뭄은 자연재해 중 인간을 가장 심한 공포로 몰고 간 현상이었다.

 

서기 300년, “봄 정월에 지진이 났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春正月 地震 自二月至秋七月 不雨 年饑 民相食)”

 

민심이 흉흉해지고 유랑민과 도적떼들이 많아지면 급기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의 극한 상황들이 나타날 정도였다. 이렇듯 심한 가뭄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순서로 가뭄피해 기록이 많았고, 330년 백제에서는 벽골제를 만들기도 했으나 당시에 삼국이 가뭄에 대처하는 방법은 대부분이 기우제를 올리는 수준에 머물렀다.

 

또한 《삼국사기》의 비와 홍수(큰물) 기록은 68건이다. 홍수 기록은 단순히 홍수 발생뿐만 아니라 홍수로 인한 인명피해, 산사태 등을 언급하고 있다.

 

서기 589년, “가을 7월 나라 서쪽에 큰물이 나서 민가 30,360호가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고 죽은 사람이 200여 명이었다.(秋七月 國西大水 漂沒人戶 三萬三百六十 死者二百餘人)”

 

이 신라 홍수 기록은 인명 피해 뿐 아니라 민가 피해를 구체적인 통계값으로 언급한 유일한 기록이다.

 

경주첨성대.

▲ 《삼국유사》에는 “이 왕(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

대를 쌓았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첨성대는 신라시대 축조된

 국보 제31호로,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일식, 유성 통해 하늘과 인간세계 교감해

 

한편 《삼국사기》의 천문기록 218건 중에서는 일식이 66건(30.3%)으로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이 혜성, 유성의 순서이다. 이러한 천문기록을 통해 하늘과 인간세계가 같이 교감한다는 고대인들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총 66건의 유성 기록이 있는데, 이 중 땅에 떨어졌다는 기록이 10건이다. 직접 피해를 입힌 것은 333년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는 백제 기록 1건이고, 6건은 전시(戰時)의 기록이다.

 

647년에 신라 귀족 비담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기록을 보면 유성이 수도에 떨어지자 비담은 사병들에게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으니, 이는 여왕(선덕)이 패할 징조”라 했다. 이에 김유신은 불붙인 허수아비를 매단 연을 하늘로 띄워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냈고, 정변은 결국 민심을 잡은 여왕과 김유신의 승리로 끝났다. 별의 추락은 홍수나 지진과 같이 직접 피해를 입히는 재해는 아니지만, 이와 같이 국운을 흔들 수 있는 천재(天災)였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큰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기 766년, “봄 정월에 해가 두 개나 나타났다(春正月 二日並出)”

 

《삼국유사》에서 “해가 두 개나 나타났다”고 밝힌 이 부분은 ‘환일(幻日, parhelion)현상’으로 추정된다. 천인상응적 입장에서 이해하면 반란으로 얼룩진 혜공왕 시대의 정치적 혼란을 암시하는 듯하다. 혜공왕은 김지정의 난(780년)으로 죽었고 신라의 중대(中代) 왕실은 막을 내렸다. 환일현상은 ‘무리해’라고도 불리며 대기에 떠있는 미세한 얼음조각이 태양빛에 굴절·반사돼 또 다른 태양이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진도 6.7 지진 발생해 100여명 사망하기도

 

서기 2년, “가을 8월에 지진이 났다(秋八月 地震)”

 

이 기록은 고구려 유리명왕 21년(서기 2년)에 쓰인 최초의 지진기록이다. 《삼국사기》의 지진기록은 모두 97건이다. 779년 신라 지진 기록은 인명피해 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힌 유일한 기록으로, ‘봄 3월에 경도(경주)에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를 현대 지진 규모로 환산하면 6.7에 해당한다. 아이티 지진이 규모 7.0인 것과 비교해 볼 때 유사한 규모의 대지진이 과거 한반도에도 발생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진 기록은 삼국 중에서 신라의 기록수가 가장 많으며, 연대별로 보면 7~8세기가 다른 세기에 비해 많으나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삼국사기의 기록에만 의존해 7~8세기에 신라에 지진이 많이 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분명 과거의 한반도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이번에 발행한 ‘한국 기상기록집’은 기상청이 자연과학자 및 역사학자와 합심해 만들어낸 첫 번째 성과물로, 기상연구소 홈페이지(hwww.nimr.go.kr)에 e-book 형태로도 게재해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기상청은 현재 ‘조선 시대 측우기를 이용한 한반도 강수량 측정 기록’ 등 한국 기상기록집 연작 후속 작업을 준비 중이다. 

 

<자료=기상청>

 

lisian@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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