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01102937_3441433590

▲독립운동가 원심창 선생 <사진제공=독립기념관>

 

[환경일보] 권소망 기자 =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은 국가보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원심창(元心昌, 1906. 12. 1 ~ 1971. 7. 4) 선생을 2013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12월 한 달 간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

 

원심창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했고,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됐다. 이후 1923년 일본 도쿄의 니혼(日本)대학 사회과에 입학했으나, 학비 조달의 어려움으로 자퇴하고 독학으로 아나키즘을 배우고, 수용했다. 선생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과 박열의 일왕폭살기도 사건에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선생은 1924년 일본의 유학생과 함께 흑우회를 재건하고, 1927년 흑풍회로 개칭, 이듬해 흑우연맹으로 확대·개편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이외에도 반공산주의 활동과 노동운동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30년 중국으로 망명, 이듬해 5월 상하이에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총 본부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다. 아울러 흑색공포단의 대원으로 천진에 있는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활동을 지원하는 등 의열투쟁에도 참여했다.

 

1933년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는 국민당 정부에게 만주 포기를 종용하는 교섭을 위해 국민당 주요 인사를 매수하려는 연회를 개최했다. 그는 주중일본공사 처단 및 일본의 계획을 방해하고자 백정기, 이강훈의사와 함께 육삼정의거(1933.3.17)를 일으켰으나, 안타깝게 거사 직전 피체돼 거행하지 못했다.

 

비록 의거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와 친일국민당파의 계략이 알려지면서,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려는 일제의 공작은 실패하게 됐다.

 

재판 과정에서 당당하게 일제의 죄악상과 야만적 행패를 꾸짖은 원심창 선생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광복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1977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somang0912@hkbs.co.kr

저작권자 © 환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