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 캘리그라피협회 유현덕 회장

‘봄’을 각자의 글씨로 담아낸
한국 캘리그라피협회 무술년 협회전 ‘봄’

한국캘리그라피협회는 4월2일부터 22일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도서관 미추홀터에서 협회전 '봄'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다. <사진=김민혜 기자>

[환경일보] 김민혜 기자 = “봄이면 사방에서 ‘벚꽃엔딩’만 들려요.” 한국캘리그라피협회 회장 유현덕 작가(58)는 최근, 미디어로부터 봄을 강요받고 있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벚꽃의 흩날림 같은 특정한 이미지의 봄 말이다.

이런 획일성을 탈피하고자 기획했다는 이번 협회전 ‘봄’에는 정말 제각각의 봄이 피어올라 있었다. 진심을 담은 캘리그라피의 발전을 위해 소신을 고집하고 있는 유현덕 작가를 만나 그가 담아내고 있는 진심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 주>

 

 

한국캘리그라피협회 회장 '일연' 유현덕 작가

다소 독특한 전시회네요. 어떻게 한 글자 전시회를 기획하게 됐습니까

최근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드라이플라워로 장식하는 등 ‘가벼움의 극치’를 달리는 작업자들이 많아졌어요. 저는 캘리그라퍼라면 글씨에 조금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화가들께 맡기고, 캘리그라퍼들은 그 시간에 글씨 하나 더 쓰고 글씨에 대해 더 연구해야 발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캘리그라피를 배우면 ‘꽃길만 걷자’,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멘트만 많이 씁니다. 이건 공부를 안 한다는 거예요. 캘리그라피는 아름답거나 감각적으로 보이게만 쓰는 게 아닙니다. 솔직하게 쓰는 거죠.

솔직함이란 작가의 솔직함일 수도, 대상에 대한 솔직함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사람도 상황에 따라 수십 가지의 마음, 수천 감정 느낌을 가질 수 있죠. 그러면 그 상황과 느낌에 따라 글씨도 다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봄’을 같은 글씨, 같은 사이즈 작품의 전시회로 기획하게 됐습니다.

 

일연 유현덕 작품 거꾸로봄, 꿈인가봄(왼쪽부터)

선생님의 작품들은 그중에서도 특색이 강한 편인 것 같습니다. 일부러 같은 표현을 탈피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인가요

제가 그동안 맞이했던 약 60번의 ‘봄’들은 모두 다른 봄이었습니다. 요새는 SNS도 발달되고, 미디어도 통합되다 보니 ‘봄’도 일정한 이미지로 강요받는 것 같아요, 이런 현상들이 안타까워서 다양하게 표현해 봤습니다.

먼저 ‘거꾸로 봄’은 실제로 작업 시 글씨를 거꾸로 쓴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땅 위의 봄만 봄으로 여기는데, 실제로 봄은 땅속 뿌리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죠. 땅속에서 겨울의 힘듦을 이겨낸 것을 바라보자는 의미로 작업했습니다.

‘노란가봄’은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산수유를, ‘꿈인가봄’은 지평선의 아지랑이를 보며 봄이 왔음을 느꼈던 어린 날의 기억을 표현했습니다. 작품마다 표현 기법이나 도구가 모두 다르죠.

 

"글씨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 건드려주고,
손 한번 잡아주는 역할 할 수 있다면 훌륭하다고 생각해"


작품에 대해 굉장히 엄격하신 것 같아요. 예술가의 뚝심이 느껴집니다

캘리그라피 협회도 여러 개가 있지만, 저희 협회는 고집을 많이 부리는 편입니다. 그래서 회원도 많지는 않은 편이죠. 한글을 파괴하거나 글씨 외적인 것에 치중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합니다. 이런 고집도 없이 일반인들에게 캘리그라피를 통해 감동 혹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어렵다고 봅니다.

저는 아직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표현해 본 적이 없습니다. 목표는 예술가이지만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요. 캘리그라퍼로서 글씨를 통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번 건드려주고, 손을 한번 잡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시회에는 13명의 작가가 29점의 작품을 공개했다.

그렇다면 예술의 경지란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시는지

‘예술’이라 하려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작업하는 내 자신이 행복한 수준에 이르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스스로가 행복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중음악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캘리그라피를 서예와 비교하면 일반인들에게 무릎을 굽혀 다가갈 수 있고, 일반인들이 보다 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서예가들이 비교적 본인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글씨를 쓴다면, 캘리그라피는 아무래도 남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벼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캘리그라피 쪽으로 넘어온 서예가들 중 많은 분이 “캘리그라피는 마음대로 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더군요. 그분들 눈에는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봅니다. 그렇지만 지킬 것은 지키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한글 파괴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고집’ 중에 하나가 한글이군요

한글 파괴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요. 우리말이 200년 후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말이 없어지면 한글은 당연히 없어지게 되겠죠. 그런데 글씨를 쓰는 일을 하는 우리가 앞장서서 한글을 파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캘리그라퍼의 눈으로 보면 요새 방송은 문제가 많아요. 시청률 하나 얻자고 조금 유행하는 말이라면 맥락도 없는 말을 오·남용 하는 것은 물론 자막으로까지 보여줍니다. 방송통신위원회 차원에서 규제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고 답답합니다. 이렇게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한글파괴가 자행되고 있기 때문에 협회 내에서라도 한글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유현덕 작가는 캘리그라피란 '진심'을 담아 글씨를 쓰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작품 안에는 단어의 뜻뿐 아니라
마음과 체온, 설레는 맥박 등도 담겨 있어야“
 

캘리그라피와 관련된 산업도 커지고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산업적이든 예술적이든 순수 회화적이든 목적을 떠나서 작가들에게 ‘진심을 담아 글씨를 썼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프로포즈를 준비하는 사람이 캘리그라퍼에게 ‘사랑합니다’라는 글씨를 의뢰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작가가 밤새 부부싸움을 하고 마음속에 화가 가득한 상태에서 글씨를 써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의뢰하는 사람도 글씨를 몰라서 작업을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캘리그라피 작품 안에는 단어의 뜻뿐 아니라 마음과 체온, 설레는 맥박 등도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캘리그라퍼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쓸 말도 없어 시중에 유행하는 남의 글이나 노래 가사만 늘어놓게 되는 겁니다. 감성글씨란 본질을 해석해서 절절히 토해내는 것이거든요. 이해하지 못하고 쓴 글씨에는 그저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기교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울림이 없죠.


문구가 달라지면 글씨체도 달라지겠네요

당연합니다. 그래서 캘리그라퍼 중에서도 작품을 보면서 “이건 누구 체네요?”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한심한 말입니다. 물론 개인 특유의 특성은 있겠지만. 그 정도로 모든 글을 획일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뜨거운 것·차가운 것, 슬픈 것·기쁜 것, 사랑·미움을 모두 비슷하게 표현할 것 같으면 폰트를 사용하지, 뭐 하러 캘리그라피를 하겠습니까.


협회전은 매년 여시나요

네, 매년 개최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5월과 9월에 전시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5월에는 송파 구민회관 예송 미술관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함께 지방선거를 하나의 축제로 만들어 보자는 의미로 ‘축제’라는 주제 아래 전시회를 열 생각입니다. 9월에는 남산미술관에서 ‘서울’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소개할 예정이고요.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협회전이 있다면요

2017년 세종문화회관서 했던 전시회가 기억에 남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공정한 선거를 주제로 개최했던 전시회였습니다. 정치적인 문구나 색은 배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지 선거를 공정하고 아름답게 치르자는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고민만큼 재밌는 작업이었습니다.

한쪽 벽면에는 관람객들이 ‘이런 사람을 뽑고 싶다’,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 등을 직접 적어 붙이기도 했는데, 모두가 함께 완성한 전시회라 더욱 의미가 깊었습니다.

 

“환경운동 관련 퍼포먼스 매년 참여
한 번이라도 환경의 가치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생겼으면 바람“

 

2014년 온실가스 줄이기 캠페인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신 바 있는데,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많이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환경운동 관련 퍼포먼스는 2014년부터 시작해 매년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의 퍼포먼스로 한 번이라도 환경의 가치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친환경적으로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저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견해는 어떠신지 궁급합니다.

저는 지금만큼의 봄이라도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습니다. 어릴 적의 봄과 비교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요. 우리 이웃나라가 발전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오염물질 배출 역시 늘어나기도 했고요. 늦었지만 지금만큼이라도 보존해서 후손들도 오늘만큼의 하늘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유현덕 작가는 글씨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는 수준이라면 못 쓴 글씨가 아니다"라며 스스로의 글씨를 사랑하라고 조언했다.

예쁜 글씨를 따라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내야 한다’고 하셨는데, 비결이나 방법이 있습니까. ‘악필’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한 말씀 해주세요

대부분의 사람이 한글 글씨체 자체를 교육받은 적이 없습니다. 중간 과정이 없이 훈민정음 다음이 바로 내 글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필이라는 것도 사실 기준이 없습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캘리그라퍼나 작가들이 잘못 준 인식이죠.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는 수준이라면, 못 쓴 글씨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글씨를 썼을 때의 감정이 잘 묻어난다면 좋은 글씨입니다.

여기에 전시된 글씨 중에도 통상적으로 말하는 ‘못난’ 글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못난 ‘봄’일 수도 있거든요. 밭의 퇴비 냄새를 표현한 봄일 수도,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낸 가슴 아픈 봄일 수도 있으니 말이죠. 단지 글을 쓰는 순간, 스스로에게 솔직하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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