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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철의 떡갈나무 혁명⑥]
합리적 잣대로 생명의 풍부함을 재단하지 말자!
바이러스, 유인원, 가장자리 논증의 오류
신승철 작가

[환경일보] 합리주의적 대화법은 “이것은 책상이다”라는 지시대상에 대한 적시성이 분명하고, “거기까지는 A이고 거기부터는 B이고”라는 방식으로 정확히 경계를 나눌 수 있는 대화법으로부터 유래한다. 철학사에서의 합리론은 “A는 A이다”라는 동어반복(tautology)를 기반으로 하며, 거기에서 논의되는 사물, 생명, 인간 등은 미리 주어진(a priori) 전제조건이다. 합리적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둘러싼 상황이 당연히 미리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황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사랑과 정동의 요소를 전혀 바라보지 못한다. 즉, “컵은 컵이다” 혹은 “이 컵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때 마치 본질과 경계를 정확히 구분한 것 같지만, 그 컵이 있기까지 컵을 닦고 아끼고 정돈했던 모든 행위들과는 무관해지는 것이다. 생명의 의미와 개념을 명확히 할 때, 관계는 위생적이고 탈색된 것으로 바뀌게 되어 그 생명 주변에 살림, 모심, 보살핌, 돌봄, 섬김 등의 정동(affect)의 요소는 소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 사회가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으로 사고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 사회는 사랑, 욕망, 정동을 통해서 구성되고 만들어져야 할 결론이지 처음부터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다. 즉, 합리주의적 대화법은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책임관계를 정확하게 구분 짓는 것 같지만, 그 상황과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수많은 노력과 실천, 행동양식에 대해서는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합리적인 사람들이 주로 걸려드는 오류가 바로 ‘가장자리 논증의 오류’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장자리 논증의 오류는 경계를 분명히 하려고 함으로써 걸려드는 오류이다. 이를 테면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 어디까지가 나의 공로이고 어디까지가 상대방의 공로인지 정확히 구획화할 수 없다. 즉, 커먼즈(Commons)라는 공통재를 만들어나갈 때,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공통성의 영역이 등장하는 것이다. 공통성의 영역은 공동체가 구성될 때, 서로 공감하고 서로가 만드는 미세한 화음에 따라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는 공유의 영역이다. 커먼즈의 영역은 오픈소스, 생태적 지혜, 공유자산 등으로 불려 왔다. 만약 다함께 생산한 커먼즈를 개인이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 절차와 과정은 너와 나 사이에서 만들어진 공통의 규칙에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공통의 규칙을 따르고 싶지 않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바가 바로 내 것과 네 것을 정확히 구분하고 분류하고 싶은 합리주의의 유혹이다. 이에 따라 커먼즈 내에서 자신의 영역을 마치 자로 잰 듯이 정확히 분류하고 구분하려는 노력은, 바로 가장자리의 영역이 너무 클 수도 있고, 겹쳐 있거나, 정확히 구분될 수 없는 혼재면(混在面)일 가능성에 대해서 부정하고자 하는 무망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합리론이 갖고 있는 비합리성으로서 가장자리 논증의 오류를 말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인간과 생명, 사물의 경계도 정확히 구분되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개, 고양이, 시계, 밥솥, 컴퓨터 등 우리가 구분해서 이름을 부를 수 잇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생물로 들어가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흔히 세균이라고 부르는 박테리아의 경우에는 그 내부에 자기생산하는 신진대사가 있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경우에는 어떨까? 그것은 생명처럼 증식하지만, 그 내부에 신진대사를 하지 않는다. 혹자는 바이러스는 사물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바이러스는 생명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논의가 분분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점은 생명과 사물 사이에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음을 바이러스가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흔히 인간의 지능을 측정하는 IQ를 기준점으로 삼을 때, 유인원의 경우는 6세 아동의 지능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신체는 동물이 갖고 있는 속성들도 많이 갖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과 동물의 명확한 구분이 과연 가능할까? 결국 생명과 신체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을 동물과 명확히 구분하려는 것은 가장자리 논증의 오류를 의미할 뿐이다. 인간은 미리 주어져 있어 구획화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구성과정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실천과 인식과 행위의 결과물인 셈이다.

가장자리 논증의 오류가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사물과 생명, 인간의 본질과 이유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의 곁, 가장자리, 주변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즉, 사물이나 생명을 “~은 ~이다”라고 단정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곁과 주변, 가장자리에서 서식하는 사랑, 정동, 욕망, 돌봄이 더 우리의 시야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이를 테면 “이 셔츠는 내 거야, 내가 샀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그 셔츠는 누가 다려주고 누가 세탁했지?”라고 반문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중심에 서기를 원하고 가장자리는 왠지 와해되고 강렬도가 없는 느슨한 곳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생태학자들은 가장자리효과라는 얘기를 한다. 즉 들과 산, 바다와 육지 등이 만나는 교차점, 즉 가장자리의 강렬도가 가장 높아서 그곳에서 생명들이 창발되었다는 것이다. 합리적 사고로 구분 가능하도록 가장자리가 딱 나누어진 곳도 아니고, 가장자리가 강렬도가 약한 곳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무언가 행동에 나설 때 우리는 나 자신보다 주변을 먼저 둘러보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가장자리에 주목하면 사랑과 정동이라는 생명살림의 지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편집부  pres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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