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주어진 인간이 아니라, 창안되어야 할 인간에 대한 단상

[환경일보] 2018년 10월31일 영국 런던 의회광장에 모인 1500여명의 시민들은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이라는 자발적인 시위결사의 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정부의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했으며, 런던 켄싱턴 자연사박물관에서 멸종을 상징하는 들어 눕는 시위를 하거나 프랑스 파리박물관 계단을 핏빛으로 물들이거나, 심지어 알몸 시위조차도 감행했다. 이들의 끈질긴 노력과 구속을 각오하는 기후행동으로 인해 영국의회는 이들의 요구대로 기후위기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2050년까지 탄소배출 제로국가로 가기 위한 시민들에게로의 권한위임 등을 결의했다. 그 이후로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멸종저항 그룹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행동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50여개 시민단체와 환경단체가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결성하였고, 2019년 9월 21일 기후총파업과 거대한 기후행동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급박한 기후행동으로의 결집 이유에는 ‘IPCC보고서’나 ‘호주국립기후복원센터의 보고서’ 등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는 막대한 기후재난의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일각에서는 적어도 2% 정도의 인류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시베리아 등에 인류멸종을 대비하는 캠프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나라는 목소리도 나올 정도이다.

기후위기에 대한 반응은 때로는 생태주의자들의 냉소와 자조 섞인 목소리로도 나타난다. “인류는 이미 틀렸어, 가망성이 없어, 포기해”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하는 생태주의자들조차 등장하고 있다. 즉, 생태주의자들 중 일부는 이미 에코파시즘이 들고 나선 ‘인간은 암적인 존재이고, 자연과 생명에 해를 입히는 지구에 달라붙은 벼룩과도 같은 존재’라는 주장과 유사한 논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권’이 아닌 ‘인간을 배제한 생명권’의 주장으로도 현현하고 있다. 인간을 배제한 생명권이라는 것은 사실상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이다. 인간의 신체는 자연과 생명과 연결되어 있으며, 환경위기를 일으켰지만 동시에 해결할 결정적인 마스터키인 인간부터 배제하는 것은 사태를 방치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경멸과 냉소, 비관, 절망 등을 보면서 인간론(人間論)의 대안은 없는지,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은 여전히 가능한 화두인지를 다시 묻게 된다.

근세의 르네상스(Renaissance)는 문예부흥, 예술부흥, 인문학 등을 기치로 인간중심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로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었고, 세계를 관할하고 인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교양 있는 존재가 되었다. 특히 이러한 관점은 인간을 미리 주어진 선험적인(a priori) 한 전제조건으로 보는 서구의 인식론(epistemology)의 질문 즉, “인간은 어떻게 자연과 생명, 우주를 알 수 있는가?”와 존재론(Ontology)의 질문 즉, “인간은 어떻게 신과 우주, 자연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는가?”로 나타났다. 물론 우주, 세계, 자연은 인간을 품은 둘레환경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독립된 인간의 인식이나 존재의 설정은 사실상 오만과 착각에 가까운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우주 안에 있으면서 어떻게 우주를 외부관찰자로서 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근대의 주체(subject)로서 존립근거는 사실상 허약한 의지나 의식에 과도한 역할을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성장주의, 개발주의, 토건주의, 성공주의 등의 통속적인 문명의 양상으로 점차 화석화되었고, 자연과 생명을 도구화하고 인간 자체 역시도 도구화함으로써 결국 기괴한 파시즘의 절멸캠프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이익과 이득에 눈멀고 자연과 생명, 소수자를 파괴하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대가 인간 스스로에 대한 절망과 혐오로까지 나타나는 상황은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인간 종 멸종을 걱정해야 하는 현재의 국면에서는 인간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할 필요가 대두된다. 이제 인간이나 사회나 공동체는 미리 주어진 선험적인 전제조건이 결코 아니다. 정동(affect), 돌봄, 살림, 사랑, 욕망이 만들어내야 할 결론이지, 미리 전제되어 있어서 소모하고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의 인식론과 존재론은 완벽하게 기각된다. 근대의 패러다임은 헤겔의 변증법 구도처럼 사회나 인륜적 공동체나 인간이 미리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에 기반하여 모순과 갈등, 대립을 일으켜도 금방 사회나 인간의 성숙으로 향할 것이라는 구도에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나 사회는 구성되고 창안되고 만들어지도록 끊임없이 양육되고 보살펴지고 돌봐져야 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모순이나 적대와 같은 근대적 패러다임은 테러와 내전, 사회분열, 증오의 파시즘 등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멸종저항의 인간론은 바로 구성적 인간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구성적 인간론을 ‘주체성 생산’(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이라는 개념으로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너와 나 사이에서 그 일을 해낼 어느 누군가를 만들어내자!”는 기획이다.

생명권의 시대는 인간을 경멸하는 에코파시즘이 아니라, 인간이 내재한 정동과 사랑이 만개하는 시대를 의미할 것이다. 구성적 인간은 대지의 양육자, 동물의 대리인, 자연과 생명의 시중꾼, 살림과 정동의 실천가로서의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구성적 인간론은, 기술파시즘으로 전락한 포스트휴머니즘처럼 인간을 지나치게 뺄셈하거나, 에코파시즘처럼 인간을 경멸하고 자연주의로 회귀하거나, 분리주의 파시즘처럼 이주민과 난민을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구성적 인간론은 인간이 가진 가장 돌봄, 살림, 정동의 잠재력에 대해서 주목하면서, 끊임없이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자연과 생명, 대지와의 공존과 공생을 추구하는 방향일 것이다. 기후위기를 알리며 멸종저항운동을 벌이는 절박한 사람들의 모습은 결국 구성적 인간론의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나갈 색다른 인류의 미래를 꿈꾸고 문명을 재건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멸종저항은 앞으로 구성될 인류에 대한 미래의 외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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