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식 작가가 만난 뻔FUN한 예술가 ⑤] 서양화가 김선태

구만리 130x60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16년 김선태
김선태 작가는 1983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 1988년 파리8대학 조형예술학과, 1991년 파리8대학원 조형예술학과, 1993년 파리국립미술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환경일보] 회화는 색과 형태를 통해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 있다. 작가는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의 형상이 아니라, 아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선과 형상을 통해 ‘살아있음’으로 자각되는 기억의 흐름을 담아낸다. 색의 깊은 층위와 터치로 형성된 미지의 형상들은 우리 감성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이 잠겨 있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회생시킨다.

몸속에 갇힌 의식과 무의식, 망각과 기억의 덩어리들은 작가 고유의 색감으로 풀어내 탄생시킨 다양한 형상들이다. 이는 그 어떤 사유와 의미에도 갇혀 있지 않은 자유로움 그 자체이며, 세상을 향한 내면의 울림이다. 작가가 체험한 세상의 모습은 자신과의 균열을 견뎌내는 고유한 색과 선의 형태로 변형돼 세상을 신뢰하는 새로운 시작의 힘으로 태어난다.

작가의 색채와 그 터치가 주는 감성의 깊이는 기억의 시간을 지속시키는 소리의 울림으로 퍼진다. 그것은 현재에 갇힌 생각과 의미를 지워버리고, 몸과 만나는 세상과의 경계를 색과 소리로 물들게 한다. 회화는 작가 자신이 정직하게 대면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자유로움과 위안의 힘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작품소개 중에서>

무제 193x130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18년 김선태

김선태는 무엇을 그리는가? 하지만 질문의 시점을 ‘그려진 무언가’에서 조금 앞당겨야 한다. 김선태의 세계에서 그 ‘무엇’은 외부의 상(象)이 아니라, 존재의 내면과 결부돼 있다. 김선태는 이를 ‘마음의 윤곽선’으로 표상화한다. 그런데 마음의 윤곽선을 긋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진정한 ‘나’와의 대면, 자아 속 자아로 나아가기인가? 김선태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칼 융(Carl Gustav Jung)이었다면 무의식에 존재하는 의식의 진정한 원형인 콤플렉스와의 대면을 언급했을 것이다. 마음의 경계를 넘어선 순간 형상(figuration)들의 안내는 종료된다. 콤플렉스야말로 존재의 비밀이요, 신비이기 때문이다. 형상만으로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인간의 감정과 사고, 감각과 직관을 추적하기 어렵다. 때론 집착하고 편집하면서 세계에 대해 눈떠가는 존재의 여정은 순풍에 돛을 단 것과는 늘 거리가 멀다. 인식의 수면, 의식의 밑바닥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여정엔 가장 형편이 나을 때조차 고통을 수반한다. 의식은 자기와의 대면으로 비로소 눈뜨고, 고통에 따라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김선태의 회화 과정의 얼개이기도 할 것이다.

무제 145x112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19년 김선태

다시 첫 물음으로 돌아오자. 존재 내 존재, 의식 속 의식인 콤플렉스의 기원은 어디인가?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적어도 칼 융의 이론에 따르면 그 출처는 우리 자신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조정하거나 통제할 수는 없다. 그것이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어떤 차원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것은 ‘집단 무의식’이라고 명명한 저 너머로부터 존재 안으로 들이닥친다. 굳이 융의 이론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안다. 자아 속 자아든 인격 너머 인격이든 그것은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열린 길이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전체, 현재를 넘어선 기원, 현실을 넘어 존재의 저 너머로 나 있는 어떤 심오한 개방성이다. 융은 그것을 존재보다 더 존재적인 것으로서의 ‘그림자’, 또는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그 안에 그것을 품고 있다는 의미에서 ‘태고유형’이라 했다. 물론 온전한 형상과는 거리가 먼 희미한 이미지로, 부재에 가까울 만큼 아련한 기억이다.

존재는 때론 그림자로 덮이고 흐름에 침잠 당하지만, 포로로 잡혀있는 것은 아니다. 집단 무의식과 개인에 깃든 태고유형은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한다. 매 순간 번역 불가의 원형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술은 그것을 인식의 수면 위로 끌어내는 데 있어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번역기제다. 예술이 아닌 무엇으로 자신 안의 자신을, 인격에 내재한 인격의 기원을 찾아 나서겠는가. 심리 미학의 이러한 맥락이야말로 김선태의 회화작업을 이해하는 시점이 된다. 이를 위해 김선태는 이성적 사고의 의존도를 현저하게 낮추고, 대상에 지나치게 편벽(偏僻)하도록 하는 인식에 전환을 꾀한다. 정태적 사고에서 직관적 사유 쪽으로 지향성을 교정하는 것이다.

무제 162x130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19년 김선태

김선태의 세계에서 회화는 사고와 의도의 사전적인 설계를 구현하는 이차적인 것이 아니다. 캔버스는 이미 완성된 것을 받아 적는 사후적이고 결과론적 공간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회화는 지금 일어난 사건의 즉각적인 기록이거나 사건 자체가 된다. 의지의 받아내기 아닌 의지 자체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 외부에 머무는 제삼자, 목격자가 아니라 그 사선에 전적으로 투입된다. 이는 “작품에 몰두할 때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일이 끝나고 나서야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 깨닫곤 한다”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접근과 유사한 맥락이다.

이 세계는 더 이상 구성된 세계가 아니다. 강렬한 색과 격한 제스처, 종종 퍼부어지다시피 하는 안료와 그것의 층이 만든 어둡고 깊은 텍스처······. 이 모든 것들은 사전적인 계획의 산물이 아니다. 어떤 것들은 훨씬 더 순간적인 실행의 산물이다. 색의 역동과 안료의 요동 속에서 어렴풋한 인체의 실루엣이 나타나기도 하고, 선들은 종종 형태를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윤곽의 기능을 도맡기도 한다. 이런 경우라도 사물의 외형적 재현과의 일관된 거리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무제 130x97cm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019년 김선태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몰입의 밀도다. 작가는 그것을 시작하고 진행하지만 어떻게 끝나는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끝나기는 하는 것일까? 그조차도 불분명하다. 아마도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를 환기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끝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나는 작품을 끝내지 않습니다. …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림이란 끝장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내가 해야 할 일은 항상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지 결코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선태의 회화에서도 완성은 낯선 개념이다. 이 세계는 완성이 아닌 불확실성으로, 열린 개방으로의 지속적인 투입이다. 여전히 길을 찾고 있는 우직함으로, 그리고 ‘오브제의 미학’에서 ‘도상(途上)의 미학’으로의 선회다. 이러한 그리기가 진정 성공적일 때 어떤 미덕이 발흥하는 가? 무언가를 분석하고 설명하도록 보는 이를 몰아붙이지 않고서도, 자신과 자신에 대한 무지로 다가서게 한다. 배열과 구성의 감각적 음미, 시각적 조화나 파열로부터는 오는 지각의 유희를 넘어서야 한다는 인식, 존재와 존재 너머의 존재에 대한 어떤 통절한 갈증, 자아와 인격의 저 밑과의 희미하지만 자명한 대면으로의 이끌림. 지금도 여전히 김선태가 그 추구를 멈추지 않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와 관련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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