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6년 미국에서 출판된 <잃어버린 미래(Our Stolen Future)>라는 책을 통해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환경 호르몬은 현재 세계야생동물보호기금 목록에서 67종, 일본 후생성에서 143종, 미국에서 73종의 화학물질을 규정하고 있으며, 극히 적은 양으로도 인간과 생태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물질이다.
얼마 전 국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수입 화장품에서 환경호르몬의 일종인 포탈레이트가 검출돼 파문이 일고 있다. 더구나 검출된 포탈레이트는 작년 유럽에서 카드뮴에 비교 될 정도의 치명적 독성을 가진 물질로 밝혀졌으며, 동물실험 결과 간과 신장, 심장, 허파 등에 영향을 미친다. 또 우리 나라 해안에 서식하는 고둥류가 환경호르몬으로 인해 성전환 현상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으며, 지리산을 비롯한 남해와 가덕도 등의 청정지역에 서식하는 들쥐마저 환경호르몬이 정상치보다 최고 35배 이상 검출됐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평택 소각장 인근 주민들의 혈중 평균 다이옥신의 농도가 세계적으로 보고된 사례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환경단체의 보고는 충격으로 느껴진다.
이처럼 환경호르몬은 인간을 포함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 가장 치명적 오염원이다. 하지만 정부의 환경호르몬 관련 대책과 규제는 매우 소극적이다. 물론 환경호르몬 검출 식품, 제품이 워낙 범위가 광범위하고 하나하나 따로 위해성 평가를 통해 규제치를 설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세계적으로도 환경호르몬에 대한 광범위하고 전체적 규제를 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뿐이라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호르몬에 대한 규제와 대책을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외국의 연구 사례를 잠시 보면 작년 3월 영국에서 선진국 남성들의 정자수가 반세기동안 절반 이하로 급격히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고, 남성의 생식능력을 저하시키는 원인으로도 분석됐다. 사태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환경부는 환경호르몬에 대한 적극적 대책 수립을 하지 않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환경호르몬 전체를 아우르는 법규를 마련하고 있지는 않지만 개별 화학물질 연구에 막대한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으며, 차근차근 규제를 마련해 가고 있다.
얼마 전 환경관리공단이 국내 최초로 토양, 대기, 수질 혈액시료 등 모든 분야의 다이옥신 국제시험기관으로 인정받아 환경호르몬 물질 중 다이옥신 분석의 국제적 공신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다이옥신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환경호르몬 뿐 아니라 포탈레이트와 같이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환경호르몬에 대한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물론 환경부는 수 년전 2008년까지로 하는 내분비계 장애물질 중장기 연구사업을 수립했고 매년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환경호르몬 관련 국내 법규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 등에서 규제하고 있을 뿐, 농약이나 의약품과 같이 치명적 환경호르몬 배출 품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특별한 법규가 마련돼 있지 않다.
정부는 우선 여러 가지 환경호르몬의 위해성을 조사·연구해 국제협력을 통한 공동연구와 정보공유를 시도해야 한다. 또 국민에게 환경호르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플라스틱 제품의 사용억제를 유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위해성이 규명된 환경호르몬에 대해서는 사회·경제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규제방안을 검토해 효과적인 규제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환경호르몬은 환경부, 식품의약품안전청, 농촌진흥청, 해양수산부, 노동부 등으로 사안에 따라 나눠서 관리되고 있다. 이렇게 나눠져 있는 관리체제로는 체계적인 환경호르몬 관리가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보다 효율적인 환경호르몬 관리를 위해서는 국가차원의 종합적 관리부서의 설치도 고려해야 한다.
환경호르몬은 특정한 제품에서 검출되는 물질이 아니다. 흔히 마시는 돌려따는 맥주의 병뚜껑에서 검출되고, 유아용 장난감에서도, 화장품에서도 검출되고 있다. 즉 실생활과 가장 관련이 깊은 오염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앞서 말한 대책과 함께 특정유해물질에 대한 환경기준을 제시하는 특별법 제정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소리 없는 살인마 환경호르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서 조금씩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

권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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