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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긴 천 가지 표정, 심우채의 묵언 시리즈[서양화가 김중식이 만난 뻔FUN한 예술가 ㊹] 심우채 작가
Silence1303 180x122cm Watercolor&Mixedmedia on linen 2013
심우채 화백은 바위의 아름다움을 시적인 감성 언어로 표현해왔다. 자연주의 경향의 작가이면서 선과 색의 독창적인 운용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

[환경일보] 모든 사물은 제자리가 있다. 그 자리 그 모습으로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가치를 지닌다.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미’를 실재감 있게 표현함으로써 대지 위에 있는 모든 사물의 소중함과 간과하기 쉬운 아름다움의 본질, 원형의 세계가 극명하게 드러나길 원한다. 작품의 주제는 클로즈업해 간소화하고, 배경은 사물과 빛을 형상화해 선과 여백을 통한 절제의 미와 무한한 상상력을 갖게 함으로써 주제에 시선을 집약시킨다.

나의 작품 하나하나는 보편적인 삶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순간들이다. 모든 과거의 기억과 사물에 대한 경험은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된다. 어린 시절 추억과 삶의 질곡에서 얻은 감성, 사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이 사실표현을 통해 배어 나오길 원한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얻은 순화된 정서와 일상적이며 평범한 사물에 대한 애착으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화지(畵紙) 위에 옮기고, 무상한 시간의 흐름을 순간순간 포착해 영원한 이미지로 남기고자 한다. 또한 내면 심리에 집중해 느끼고 지각하는 정신세계를 작품을 통해 드러내며, 상호 소통의 한 방식으로 진솔한 목소리가 전달되고자 한다.

의도하지 않으면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하는데,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다. 이것은 바로 시작도 끝도 아닌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작가노트 중에서>

시간이 남기고 간 언어

Silence-chorus1314 162x130.3cm Watercolor&Mixedmedia on linen 2013

“나는 언제나 자연과 인간성의 소중함을 경시하고 물질 위주로 판단되는 현실에 아름다운 경종을 울리고 싶다.”

화가 심우채의 자전적 발언이다. 심우채 작가의 그림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작품세계를 주의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가 어떠한 이념으로 어떠한 모티브를 회화주제로 삼고 있는가도 중요하다. 심우채는 그러한 필요성이 절실한 가장 전형적인 작가다. 그는 수십여 년 전부터 일반 화가들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수채화 작업을 지독하게 고집해 왔다.

심우채는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고집스러운 수채화가로 유명하다. 이러한 집념으로 그는 수채화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표현력과 묘사력으로 단연 손꼽히는 중견 작가가 되었다. 특히 사실적인 리얼리티가 주는 감동적인 인물의 표정, 유화를 방불케 하는 부드러운 붓 터치와 선, 그리고 색채의 탁월한 감각은 심우채가 범상치 않은 작가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는 일찍부터 여성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풍경과 조화시킨 누드로도 독자적 영역을 개척해왔다. 특히 사실적인 표현으로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을 주요하게 다루면서 여인의 누드를 통한 ‘인간의 우수와 적막, 자연의 서정과 무위를 갈빛 언어’로 조형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감칠맛 나는 누드 묘사에서 돋보이는 여체의 단정한 미감, 절제된 선과 색채는 단연 심우채가 그토록 소망하는 “여성의 누드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경이로운 조화를 편안하게 담아내려 했다”는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킨다.

묵언1006 120.2x120cm Watercolor&Mixed media on linen 2010

그런 그가 이번에는 과거 서정적인 자연의 모습과 아름다운 여인들의 삶의 표정을 잠시 뒤로 두고 ‘바위’라는 주제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그를 잘 아는 나로서는 좀 더 그가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세계를 지속해 주길 바랐지만, 그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 있는 곳으로 붓을 옮겨 갔다. 그 변화가 약간은 생경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익히 심우채의 인간적 품성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탐색,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작품 모티브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발견에 속한다.

그렇다면 ‘왜 바위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문에 그는 정말 예술가로서 한결같은 삶을 살아가려는 자신의 의지와 바위가 지닌 침묵의 메시지와 너무나도 일치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됐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에게 있어서 바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이해를 우리는 한국인의 돌, 특히 바위에 대한 각별한 가치 부여와 유별난 애정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유명한 시인이 쓴 ‘바위’라는 시를 인용하고 싶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린(愛隣)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로 우리나라 생명 의지의 대표적 시인을 꼽히는 청마 유치환의 ‘바위’ 전문이다.

‘나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이 시처럼 심우채가 바위를 그리는 심정을 더는 대변 해 줄 수식어는 없다. 두말할 것 없이 바위는 내면의 견고하고 말 없는, 굳세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가치의 표상이다.

즉 작가는 바위 같은 사람으로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애린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바람에 깎여도 함묵하고, 생명도 망각하고,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깨어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 세속적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되겠다는 시인의 의지는 바위에 있다.

사실 작가 심우채의 바위를 향한 치열한 정신도 여기에 함축돼 있다. 그는 역설적으로 쉽게 감정에 흔들리고, 자기 절제를 고민하는 결의의 의미로 바위가 되고 싶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우채는 이 바위들을 모아 <묵언>이라고 했다. 물론 이 바위 연작도 그가 기존에 추구해왔던 자연에 속한 하나의 대상들로 자연풍경에 하나이기도 하다.

천상의춤(압살라댄스)2001 162.2x112.1cm Watercolor on paper 2020

작가는 이러한 바위의 표현을 단순히 사실적인 기술로 풍경의 대상으로만 담아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지는 바위를 화면의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배경을 대담하게 정리하고, 다소 추상적 패턴으로의 배경처리에서 확인된다. 많은 대작에서 전면에 바위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작가는 자연스러운 순리의 무위 자연적인 바위의 모습을 묵시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바위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며 시작도 끝도 아닌 영원성을 함축하고 있는 대상으로, 심우채의 정신이나 의지가 담긴 새로운 바위로 탄생하는 것이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작업하는 심우채의 사유 세계를 담아내기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소재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심우채는 진실과 순수를 찾아 지금까지 온 작가로서 자연 최고의 조형미의 결정체로 함축된 자연을 대변하는 千 가지의 표정을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위는 어쩌면 가장 심우채다운 오브제의 발견인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자연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경이로움을 바위에 정직하게 새겨 나간다. 화려함과 한없이 가벼운 유행을 좇는 화풍이 만연한 화단에서 그의 작품이 진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흔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채빈 기자  green900@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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