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정OO 독자

[환경일보]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는 과정은 참 고귀하고 숭고한 일이다. 물론 그에 따르는 고통과 희생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출산의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육아 과정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느끼게 되는 행복감은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윗 세대들은 자식을 위해 희생했고, 당연하다 여기며 살았다. 그렇지만 ‘너 때문에 버티고 살았다’는 말을 자식들은 애써 외면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자식을 낳고 살아가면서 그 단순하고 질척대는 듯한 ‘너 때문에’라는 말이 삶의 나침반 같았음을 깨닫게 된다. 자식이 삶의 이정표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함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데, 과거에는 적어도 남의 자식도 귀함을 인정하며 살았다.

‘정인아 미안해···’ 온 나라가 슬픔에 짓눌리고 있다. 코로나 우울증으로 많은 사람이 억눌려 있는 이때 또 다른 기막힌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 온다. 16개월밖에 안 된 아기 어디에 때릴 곳이 있었나. 때린 수준이 아니라 의도적 살인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도한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학대라고 하기엔 도를 넘어버린 이 상황에 대해 일차적 책임은 양부모에게 있지만, 다른 가족들은 관련이 없나 의문이 든다. 내 자식이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힘없는 필부들도 자식 사랑하는 마음에 손주를 돌보는 노년의 수고를 감수한다. 많은 성도들을 돌보는 목회자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작 내 집에서 비가 세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둘째로 양부모는 왜 정인이를 입양했을까. 이러한 멘탈이라면 자신의 친딸을 양육할 때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을 테고, 따라서 입양에 신중했어야 마땅하다. 일부 뉴스를 보면 친딸에게 정서적 도움을 주기 위해, 주택 구입에 모자란 대출금을 받기 위해 등등 입양의 원래 목적과는 걸맞지 않은 기막힌 내용들이 나열된다. 정인이는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양부모는 부모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고, 생명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없었다. 내 아이던 남의 아이던 똑같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부모 됨으로 인해 주어지는 선물이며 인생을 통해 배워야 할 소중한 가치인데 말이다.

셋째로 구조적 한계라는 반복되는 변명은 정당한 것인가 묻고 싶다. 이런 문제들이 불거질 때마다 국가가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수도 없이 강조돼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유사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제도보다 사람들의 인식변화가 우선 과제는 아닐까.

‘내 아이’를 뒤지지 않게 키우겠다는 생각이 상대적 박탈감이나 열등감을 부추기고 결국 ‘남의 아이’는 소모품이 되어도 좋다는 결과를 빚어냈다. 우리에게 사라진 구태의연한 가치, 도덕적 기준 등이 다시 절실하게 요구되는 작금이다. 정신문화가 실종된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생명의 고귀함을 중시하는 정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생명을 사람답게 키워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분한 만큼의 수고와 눈물이 요구된다. 세상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며 양육하는 데 필요한 ‘사랑총량의 법칙’을 경시한 우리 사회에 정인이가 경종을 울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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