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제정 4년, 자살 노동재해 ‘절반’ 넘게 은폐
10명 중 6명 산재 신청조차 못해‧‧‧ 직장 내 괴롭힘 피해도 ‘여전’
“피해자 보호 조치 및 직권주의 산재 신청‧판단 기준 개선해야”

[국회=환경일보] 김인성 기자 =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2년에 ‘직장 또는 업무상의 문제’로 자살한 국민은 무려 404명이다. 하루에 한 명꼴로 직업 관련 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셈이다.

평균 3~4개의 문제가 동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생각하면 업무상의 문제로 자살한 국민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업무 관련 자살을 방지하고 제도 개선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1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2022년 산재 자살 현황 국회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인성 기자
업무 관련 자살을 방지하고 제도 개선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1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2022년 산재 자살 현황 국회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인성 기자

2022년 질병판정서를 분석한 결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자살이 가장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2019년 7월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후 현재에 이르러 정신 질병 사망자 산재 신청 건수는 2022년 97건, 2021년 158건으로 2020년 신청건수 87건에 비해 증가했다. 직장 내 괴롭힘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전인 2019년 6월에 비해 10% 이상 감소했지만 일정 수준 이하로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제정된 지 4년이 됐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은 괴롭힘으로 고통받고 목숨을 끊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 와중에 지난 11월 고용노동부 장관이 괴롭힘의 인정 기준을 명확하게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은 3개월 이상 지속 평균 1주 이상 반복이라는 요건을 괴롭힘 인정의 기준으로 제시했으며, 전문가들은 괴롭힘 인정의 잣대를 더 높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과로 역시 자살을 불러오는 주요 원인으로 밝혀졌다. 최근 사망 이전 몇 주간 하루 평균 70~100통의 통화를 하거나, 사망 20분 전까지도 업무 통화를 한 일도 있었으며 신입사원이 주 72시간 넘게 근무하여 자살한 일이 발생한 바 있다.

특히 자살 노동재해의 경우 절반 넘게 은폐되고 있어 심각한 상황이다. 자살로 재해보상을 신청한 경우는 경찰청 통계의 36%인 147건에 불과했다. 즉, 일하다 목숨을 끊었더라도 10명 중 6명은 보상을 신청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자살 산재 승인율‧‧‧ 2022년 ‘51%’까지 내려가

어렵게 신청을 했다 하더라도 승인율 또한 낮다. 전체 산재 승인율은 90% 정도지만 자살 산재 승인율은 2018년 80%에서 2021년 56%로 꾸준히 낮아지다가 급기야 2022년에는 51%까지 내려갔다. 신청한다 하더라도 절반이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업무 관련 자살을 방지하고 제도 개선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1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2022년 산재 자살 현황 국회토론회’를 개최한 용혜인 의원은 “많은 국민들이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재해보상제도 역시 개선이 필요하지만, 공공기관의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용 의원은 현행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며 “재해 인정 기준 역시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규정돼 있어 이러한 제도 개선을 위해 국회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용혜인 의원은 이날 “많은 국민들이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재해보상제도 역시 개선이 필요하지만, 공공기관의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사진=김인성 기자
용혜인 의원은 이날 “많은 국민들이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재해보상제도 역시 개선이 필요하지만, 공공기관의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사진=김인성 기자

가까운 나라인 일본의 자살률도 적지 않은 편이었지만, 오래전부터 해결점을 적극 모색해 나가고 있다. 1998년 일본은 그해 자살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3만명을 돌파했으며, 한국에서도 금융위기 직후 자살률이 치솟은 해였다.

비슷한 시기였지만 일본은 이 문제를 우리보다 먼저 인식하고, 대응에 앞서나가 과로사방지법을 제정했고 정부 역시 정부대책을 마련해 정기적인 통계를 산출하고 있다.

“일터 위험요인‧안전보건제도 등 현황 파악 시급”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은 “국내에서도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일터 문제로 자살에 이르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일터의 위험 요인이나 안전보건제도의 허점은 무엇인지, 성별‧연령‧직종‧직위에 따라서 자살의 발생이나 이후 산재 신청‧승인 과정에 차이가 발생하는지 등에 대해 여전히 파악되지 않는 점들이 많다는 점을 꼬집은 셈이다.

‘꼭 노동자 혹은 유족만이 산재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한 현행법은 타당한가’에 대해 의문점을 제시한 이종란 반올림‧노동자권리연구소 노무사는 “노동자나 유족이 미인식으로 신청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아, 이는 당사자 보호도 안 되고 예방대책 마련으로 연결될 수도 없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독일의 경우처럼 ‘직권주의 신청방식’을 채택해 우리와 같은 노동자 임의신청주의 방식과 달리 산재의사가 직권으로 산재절차를 개시할 수 있도록 해야 ‘산재은폐’를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또 이 노무사는 “노동자 입증 어려움을 고려한 산재판단기준에 있어, 의학적 기준이 아닌 ‘규범적’ 인과관계임을 분명하게 명시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적정재해조사 기간을 정하고, 그 기간이 지연되는 사유가 발생하면 국가는 지연의 책임을 지고 재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보험급여를 우선 보장하도록 하는 ‘산재국가책임-선보장’이 마련돼야 한다”고 봤다.

죽음 고민하면서 혼자 ‘끙끙’‧‧‧ “신고 가능한 환경 조성해야”

아울러 현재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들이 죽음을 고민하면서도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직장갑질119가 지난 9월4일부터 11일까지 진행한 직장인 1000명 3분기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1년 사이 직장 내 괴롭힘 경험이 있는 응답자 359명 중 65.7%가 피해 이후 ‘참거나 모르는 척’을 했고, 27.3%가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나 노조에 신고한 비율은 6.7%, 외부 관련 기관에 신고했다는 응답은 5.3%에 불과했다.

배나은 직장갑질119 상근활동가는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을 더 폭넓게 적용해야 괴롭힘 무법지대 확장과 현장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며 “신고자 및 피해자 보호조치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인성 기자
배나은 직장갑질119 상근활동가는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을 더 폭넓게 적용해야 괴롭힘 무법지대 확장과 현장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며 “신고자 및 피해자 보호조치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인성 기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더 쉽고 안전하게 신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며, 신고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조직문화를 바꿔나가야 하지만 동시에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할 필요성도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배나은 직장갑질119 상근활동가는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을 더 폭넓게 적용해야 괴롭힘 무법지대 확장과 현장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며 “신고자 및 피해자 보호조치 강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현재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이 신고로 결과 전까지 조사 기간 중에는 아무런 제재 조항이 없다. 이 때문에 괴롭힘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피해자들은 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더 극심한 괴롭힘을 당하다 죽음까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괴롭힘 사실 확인 전에도 신고자 보호 조치를 위반할 경우 제재할 수 있는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더불어 배 활동가는 “네가 당한 것은 어지간하면 괴롭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메시지가 확산되면, 괴롭힘 피해자들이 신고를 통한 문제 해결이 아닌 절망과 죽음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면서 ‘괴롭힘 판단 기준을 높이는 것’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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