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원은 법 유예 조건 아닌 법 시행과 함께 이뤄져야

[환경일보] 11월7일 고용노동부에서 발간한 ‘중대재해 사고백서’ 표지는 2022년 1월11일 외벽이 붕괴돼 사망사고가 발생한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아이파크 모습이다. 이 사고의 표면적 이유는 콘크리트 타설 보양 부실, 무량판 구조(보 없이 바닥과 기둥만 있는 형태)의 무리한 시공이다. 하지만 이같은 부실공사를 불러온 근본 원인은 공사기간 단축, 불법 다단계 하도급이었다. 공사현장에서 사망사고가 이어지고 있는 근본 원인이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백서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경영책임자의 안전에 대한 관심과 철학, 안전을 위한 인적·물적 투자, 원청기업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이 백서의 핵심 메시지"라고 전했다.

하지만 2022년 1월27일부터 근로자 50인 이상 기업에 적용돼 시행 중인 중대재해처벌법 어디에도 화정동 아이파크 붕괴 사고 원인이 된 발주자에 대한 역할과 책임이 명시돼 있지 않다. 건설사, 감리 책임도 없다. 건설현장에서는 충분한 공사기간 보장, 원청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어떤 제도도 도입되지 않고 있다.

지난 9월 여당 환경노동위원회 간사인 임이자 의원은 2024년 1월27일 시행 예정인 5인 이상 50인 미만 기업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적용을 2년 유예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국회에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시기 유예를 위한 법 개정안 처리를 요청하기도 했다.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11월에 이르러 중대재해법 적용과 관련된 법이 발의된 것을 이유로 여야 합의를 전제로 유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의 발언을 했다.

이들은 모두 “아직 중소기업이 충분한 준비가 안 됐다”며 “법 시행과 함께 기업주 처벌이 속출할 것”이라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2년간 시행된 50인 이상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사례를 봤을 때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는 611건이었다. 사망자는 644명에 달한다. 법 시행 2년 동안 중대재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는 12월까지 단 1건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사건 개요가 정리된 고용노동부 백서만 봐도 중대재해 사망사고 611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50인 미만 중대재해처벌법은 한번 유예된 법이다. 정부와 여당은 12월27일 협의회에서 ‘중대재해 취약분야 기업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이제 대책이 마련됐으니 법을 유예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백서 발간사에서 “모든 근로자들이 따뜻한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다. 최소한 이 문구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려면 수많은 기업대표들이 법 시행으로 처벌 받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준비가 안 돼 있으니 83만 곳의 중소기업 노동자의 죽음을 방치해도 된다는 말인가. 중대재해 80%는 여전히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다. 중대재해의 경우 7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 벌금형이 내려질 수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본래 취지가 산업재해와 사망사고를 예방하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강력하게 처벌 의지를 밝혀야 한다. 진작에 나왔어야 할 대책이지만 ‘중대재해 취약분야 기업 지원’은 법 유예 조건이 아니라 법 시행과 함께 매해 이뤄져야 하는 사항이다. 작업중지권 발동 요건 확대, 안전업무 외주화 감소 등 노동자의 안전 문제 해결에 최종적 책임이 있는 기업 경영인의 결단도 중요하다.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대기업을 대상으로 시행하던 방식을 중소기업에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있다. 분명 준비 안 된 기업의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83만 곳 기업이 모든 조건을 갖출 동안 한해 몇백 명이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마저 없다면 사고원인을 두고 노동자는 기업과 무엇으로 잘못을 다툴 수 있을까. 중소기업 80%가 50인 미만 사업장이다. 최소한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은 보장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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