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본다.
늘 생각하는 문제이지만, 오늘따라 더 심각해지는 것은 ‘내 글이 혹은 이 시가 남에게 공해가 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나에게 매달 쏟아져 들어오는 책은 각종 문예지, 개인 시집들, 동인지, 각 지역의 지회지까지 합치면 한 달에 족히 30여 권은 된다. 게다가 어디어디서 팔아달라는 책들, 부피만 봐도 질려버릴 것 같은 그 두꺼운 책들을 접할 때면 더욱 아찔해진다. 물론 내가 필요해서 구입하는 책이라면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얼마 전 시인 초년생이 나에게 이런 하소연을 했다. 2년 동안 시를 가르쳐준 선생님에게 자신의 시집을 한 권 내고 싶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대뜸 하는 소리가 “내 봤자 쓰레기더미에 들어갈 책을 뭣 하러 내려고 하느냐”였단다. 그러면서 그 초년생은 “아무리 제가 못 쓴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제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냉혹하게 말씀하실 수 있느냐”며 속상해했다. 그의 앞에서 묵묵부답,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사실은 그 선생님 말씀이 천 번 만 번 옳다. 옳고 말고다.
그후 그는 그 선생님으로부터 시를 배우는 발길을 뚝 끊고 말았다. 그야말로 인연을 끊은 것이다. 그는 결국은 자비를 들여 시집을 냈다. 내 놓고는 혼자서 좋아하는 모습, 아니 자기 글에 취한 모습이 측은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물론 나도 한 권 받았다. 그런데 시가 한 편도 생각이 안 난다. 이런 시들을 읽으면서 나도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내 시도 이렇게 남에게 읽히지 않는 시, 읽히지도 못하는 글이 될까. 염려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글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을 사는 우리는 책의 공해에 아니, 활자의 공해에 짓눌려 사는 것도 같다. 매일 아침 배달되는 서너 종의 신문활자, 그 활자들 사이에 끼어 들어오는 몇 장의 전단지들, 그리고 기상천외한 사건과 사건들, 혀를 끌끌 차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활자 속의 우리들, 우리들의 영혼은 진정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사를 하면서 수백 권의 책을 도서관에 기증하려고 해 봤다. 그런데 옛날 책들은 하나도 요구하는 곳이 없었다. 그만큼 책이 흔해지기도 했고, 더구나 옛날 책들은 깨알 같은 글자에 세로로 된 책들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그런 책들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책들, 어디에 맘 놓고 버릴 곳도 없는 이런 책들도 결국은 공해가 되고 말았다. 대학 시절, 그 가난하던 시절 밥을 굶어가면서도 책을 사기 위해 청계천 고서점은 물론이고 동대문 근처를 배회하면서 서성이던 시절의 책들이 지금은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돼 버렸다. 그래도 그때는 책을 사 모으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겼던 시대다.
‘다른 것은 다 빌려줘도 책은 안 빌려준다’는 불문율을 깔면서 친구들과 책 빌려 읽기를 하던 때다. 또한 ‘이 세상에서 바보 중에 세 번째 바보가 빌려간 책을 돌려주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면서 남의 책을 슬쩍 떼어먹기까지 했다.
덤으로 추가하면 첫 번째 바보는 ‘책을 빌려 달라는 사람’이고 두 번째 바보는 ‘책을 빌려주는 사람’이란다. 이런 바보 시절을 거쳐 모은 책들이다. 그 책들이 지금은 나에게서도 천대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요즘은 필요한 내용이나 알아야 할 인물이나 사항이라면 의례히 책을 찾기에 앞서 컴퓨터 앞에 먼저 가 앉게 되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검색창을 클릭하면 롤랑 바르트, 키르케고르, 옥타비오 파스, 푸코, 장자, 노자…. 이런 사람들이 줄줄이 다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에게도 필요 없는 책들이 내 서재에서 울상으로 나를 바라볼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 온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저것들을 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내가 죽으면 저들도 그냥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자동적으로 폐기처분되겠지 하면서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영혼의 양식이라고 하는 책들이 이렇게 공해가 되고 장애물이 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끔찍하다. 언젠가 텔레비전 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
하루에 폐기처분되는 책들이 수만 톤에 달한다는 보도였다. 언뜻 보니 거기엔 대중에게 아주 널리 알려진 이름, 한국을 대표하는 저명 작가의 책들도 마구 섞여 있었다. ‘아, 저런 분들의 책들도 저렇게 불 속으로 들어가거나 작두날에 의해 무참히 찢겨 나가는 구나’ 하면서 놀란 적이 있다. 그럴진대 2~3년에 걸쳐 시 몇 줄 배우고 책을 낸다고 하니, 쓰레기 더미에 들어갈 책을 뭣 하러 내려고 하느냐고 한 그 선생님의 말이 천만 번 옳은 소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이 바로 문단 공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렇게 난무하는 활자의 공해에서 우리들 영혼은 얼마나 피폐해져야 하는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수시로 자성해 본다. 때로는 절필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또한 나에게 글을 배우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들이 글을 안 쓸 뿐이지, 하루에도 대여섯 시간씩 매일 가르치는 것이 모두 시·소설·수필·논술·문법·고전문학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잘못된 글이나 쓴 문장을 보면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 주위에는 항상 무서운 독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해! 공해! 오늘 우리들은 너무 많은 공해 속에 무방비로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공해가 말의 공해다. 말은 곧 글이 되고 활자화 되고 책이 된다. 공해가 되는 활자화 속에서 우리가 가려 먹어야 할 책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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