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이라는 장르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무협소설의 대가

[환경일보] 서양 판타지에 ‘반지의 제왕’ J. R. R. 톨킨이 있다면, 동양 무협에는 신필(神筆) 김용이 있다. 연배가 좀 있는 사람이라면 김용은 몰라도 라디오에서 하던 소설 ‘영웅문’ 광고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영웅문은 사조영웅문,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3부작을 묶은 것으로 한국이 베른 협약에 가입하기 이전에 판권 없이 출판된 작품이다. ‘동방불패’, ‘소오강호’, ‘동사서독’ 등의 영화도 모두 김용이 원작자다.

톨킨이 북유럽 신화에 상상력을 가미해 엘프와 드워프, 마법사가 활약하는 판타지 세계관을 창조했다면, 김용은 동양의 무협 세계관을 창조해 실제 중국 역사와 엮어 대중성을 가미했고, 신들린 글솜씨에 작품성까지 끌어올렸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2001~2003년 2억8100만 달러를 들여 영화 3부작으로 제작돼 박스오피스에서 29억 1749만 달러, 한화로 4조원이 넘는 수익을 거뒀다. 고작 영화 3편 찍었다고 삼성자자 정도는 돼야 가능한 수익을 달성한 것이다.

당초 원작자인 톨킨은 영화화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영화 판권도 밀린 세금을 내기 위해서 1968년에 배급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한테 그냥 헐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피터 잭슨이 대규모 물량을 때려 붓는 할리우드 방식으로 영화에 성공했고 그 결과 ‘해리 포터 실사영화 시리즈’와 함께 전 세계에 판타지 붐을 일으켰다.

반면 할리우드식 대규모 자본을 만나지 못했고, 중국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김용의 소설은 대부분 홍콩과 대만에서 영상화됐고, 홍콩 반환 이후에는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그것도 영화보다는 드라마로 제작된 경우가 많았다.

영웅문 3부작의 ‘의천도룡기’의 경우 1978년부터 드라마화가 시작됐으며 1986년에는 그 유명한 양조위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드라마로 제작했다.

영웅문 2부인 신조협려는 1983년 영화판에서 장국영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지만, 시대적 한계 때문인지 특수효과가 부실했다. 같은 해 홍콩 TVB에서는 유덕화를 주연으로 드라마로 제작했다.

이후 유덕화는 1991년 자신의 영화사를 차리고 ‘신조협려’라는 제목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당시 각본은 왕가위로 알려져 있다. 영화의 배경은 현대였고 실상은 누아르에 불과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듬해에 원규, 관지림 등과 함께 ‘신조협려2’라는 영화를 찍었지만 원작과 달리 마왕이 등장하는 등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흥행이 저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작을 감명 깊은 팬의 한사람으로서, 원작에 대한 존중 없이 양산품처럼 당시의 유행만을 좇는 영화를 줄줄이 찍어대는 홍콩 영화산업에 큰 실망을 했던 시기였다.

이후에도 홍콩, 대만, 중국은 김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줄기차게 찍어왔다.

우리가 한때 시대별 심청전을 가끔 찍었던 것과 달리, 중국은 김용의 소설 중 대중성이 높았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매년 주인공만 바꿔가면서 공장에서 비누 찍어내듯 찍어내고 있다. 새로 나오는 드라마들은 얼굴만 달라졌을 뿐, 스토리는 거의 바뀐 게 없다.

김용은 홍콩 명보의 주필로 1950년대 중반 작품 전기에서 1970년대 초반 후기까지 작품을 이어갔으며 대협(大俠) 또는 신필(神筆)로 불렸으며, 막대한 업적과 영향력으로 인해 동서고금공전절후(東西古今空前絶後)의 작가로 불렸다.

그러나 내가 젊은 시절 사랑했고 수십 번 다시 읽었던 김용의 소설은 톨킨의 3부작과 달리 여전히 활자로만 기억되고 있다. 김용의 소설이 제대로 영상화돼서 원작 팬들을 극장가로 달려가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하기야, 중국의 고전 서유기마저도 주성치 외에는 제대로 된 영화화를 본적이 없으니 오죽할까? 

중국 공산당의 검열 때문에 정치적 표현을 금기시하는 중국 영화업계에서 무협 영화마저 흥행하지 못한다면, 이젠 중국이 세계를 구한다거나, 6.25전쟁 당시 불법으로 남침한 북한군을 도운 중국인민군을 찬양하는 정신 나간 영화들만 나올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의 BTS에게 “조선군을 도운 중국인민해방군에게 왜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느냐“고 헛소리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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