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입양은 옛날 이야기? 아직도 세계 3위의 수출대국

[환경일보] 지금은 별로 많이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욕이 있다. 바로 호래자식(후레자식)과 화냥년이다. 두 가지 모두 어느 게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남녀에게 각각 최악의 욕설로 쓰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욕은 모두 병자호란과 관련된 말이다. 청나라에 대패한 조선은 회군하는 청(호)나라에 막대한 포로를 받쳐야 했고 이때 끌려가서 노비가 된 자를 ‘호로’나 ‘호노’라고 일컫는 말에서 호래자식이 나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조선이 청나라에 받친 공녀들은 오랑캐들에게 몸을 더럽혀 돌아왔다는 뜻에서 ‘환향녀’라고 불렀고 여기서 ‘화냥년’이라는 욕이 파생됐다.

당시 전쟁에 패한 원인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대부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치욕을 당한 것은 힘없는 여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사대부들은 치욕을 당한 여성들을 ‘환향녀’라 부르며 이혼을 요구하고, 왕의 허가를 받지 못해 이혼이 안 되면 가문에서 쫓아내거나 첩을 두어 평생 독수공방시키는 일이 허다했다.

그렇다면 현대는 달라졌을까? 1950년 6.25 전쟁으로 나라가 잿더미가 된 우리나라는 고아들을 대거 해외로 입양 보냈다. 어른들이 못나서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 전체가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입이라도 하나 줄이자며 아이들이 선택할 권리 따위는 무시한 체 해외로 실어보냈다. 

고아 한명을 입양보내면 입양기관에게는 수백 달러의 보상금이 지급되기에, 고아수출은 산업이 됐다. 그래서 전쟁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아이들이 탐나는 수출자원으로 취급됐다. 

때로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마저 고아로 둔갑해 태평양을 건너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로 보내졌다. 물론 입양을 보낸 가정이 제대로 된 곳인지는 관심 밖이었다. 아동복지가 목적이 아니라 커미션을 챙기는 게 목적이니까.

한국전쟁 직후에는 나라가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전쟁고아들을 국가가 책임지기 어려웠다는 변명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 갈수록 고아 수출이 줄었을까?

전쟁 직후인 1955~1960년 해외 입양된 고아는 3525명에 불과했는데, 1971~1980년 4만8247명, 1981년~1990년 사이에는 6만5321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은 서울에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개최해 '우리는 더 이상 후진국이 아니에요'라고 자랑했지만, 다른 한구석에서는 한해 수천명의 고아를 수출하는 나라였다. 개고기를 먹는 것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 정부는 보신탕집을 외국인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후 1990~2000년 사이에는 2만2323명으로, 2011~2010년에는 1만7088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1명대로 떨어진 합계출산율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다. 당시에도 미국의 입양가정들은 한국 방문도 없이 카탈로그만 보고 쇼핑하듯이 아이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2011년이 되어서야 입양 절차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서 해외 입양이 극적으로 줄었다. 다만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돌파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한국은 국제입양 아동의 안전과 권리 보호를 위한 헤이그협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여기 가입하면 입양의 책임을 입양기관이 아니라 정부가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입양을 원하는 부모들이 있어도 한국 정부는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더 많은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해외 입양 수출 3위로 포디움에서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 Larga vida a C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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