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4월 22일은 제36회 지구의 날이다.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사고를 계기로 70년 4월 22일 미 상원의원 게이로 닐슨이 주창하고, 당시 하버드대학 학생이었던 데니스 헤이즈가 나서서 첫 행사를 시작한 것이 지구의 날 행사의 출발이었다. 이날 미국에서는 약 200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대규모의 자연보호 캠페인을 전개했는데, 이날을 자연환경보호 기념일로 정한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구의 날이 세계적 규모의 시민운동으로 확산된 것은 90년에 이르러서인데 그해에는 세계 150여 개국이 참여해 지구환경보전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호소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100여 단체가 후원해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방안을 모색하고 정부와 기업, 일반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한 바 있다.

오늘날에는 지구온난화에 수반된 기후변동과 이상기상의 다발,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물 부족현상과 홍수피해, 그리고 중국 내륙지역의 사막화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한 황사피해 및 오존층의 파괴 등 지구환경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지구의 날 행사에는 전 세계적으로 180여 국가에서 약 5만여 개 단체의 주도로 5억 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지구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환경의 위기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계층은 자연환경보호론자들에게 한정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방증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지난 92년에 브라질 리우에서 개최된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는 산업화 시대의 고갈형 사회에서 탈피해 지속가능한 개발사회로 전환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세계는 자유무역체제를 통해 경제활동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논의를 시작했는데, 이는 지구환경의 위기를 부르는 고갈형 사회를 부채질하는 산업화의 확대 정책에 다름이 아니었다.

지구온난화의 원인물질을 저감시키기 위한 국제적 강제규정을 합의한 교토의정서도 미국의 반대로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구환경의 위기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 72년 스톡홀름회의 이래로 지속되고 있지만 각국의 경제적 이기주의로 인해 실천으로 옮겨진 사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교토의정서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는 것도 지구환경의 보전보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이 우선이라는 국가이기주의에 기인하고 있다.

교토의정서에서는 부속서 I국가(선진국)에 온실기체 배출량을 2008년부터 5년에 걸쳐서 평균적으로 1990년 대비 5.2% 감소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리고 2013년 이후에는 온실기체 감축 의무를 부속서 I국가군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선도적 개발도상국까지 폭넓게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토의정서에 적극적이었던 유럽 국가들은 90년 이래로 온실기체 배출량 증가가 거의 없었다. 반면 미국은 90년 이후로도 온실기체 배출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토의정서를 지키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럽 국가들은 태양·바람·지열·조력 등 기존 신재생에너지의 이용을 확대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교토의정서를 만족시킬 수 있고, 이 분야의 산업을 확대해 고용 인력을 창출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반면 전 세계 인구의 약 4.6%가 전 세계에서 소비하는 에너지의 약 25%를 소비하고 있는 미국은 기존의 신재생에너지 도입만으로는 교토의정서에서 강제하고 있는 의무를 지킬 수 없는 실정에 있다. 또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기술력에 특장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미국은 강제적 온실기체 감축에 반대하고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기술적 우위에 있는 핵융합기술의 진전을 통한 대체 에너지원 개발을 제안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서도 자연환경보전에 대한 국민적 의식이 나날이 고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 사안에 들어가면 여전히 개발론이 득세하는 단계를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시화호와 화옹호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도 새만금 개발에 나선 정부기관과 이를 합리화시켜준 법원의 처사에서 자연환경보전운동의 길이 아직 험난한 것임을 자각하게 한다. 대구에서는 앞산 4차 순환도로 건설을 둘러싸고 대구시와 시민사회 간에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환경영향평가서가 정상적으로 작성되고 통과되려면 적어도 1년 이상이 필요하지만(환경부에서 생태와 기상분야의 현장조사를 1년에 걸쳐 수행할 것을 적시했음) 대구시는 오는 6월부터 공사를 시작한다고 공언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국가기관들이 환경영향평가서가 나오기도 전에 공사부터 강행했던 전철을 밟으려는 저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공사예정지 인근의 주민들은 천막을 설치하고 농성에 돌입해 있는 상황이다. 최근 환경운동가 폴 콜먼이 이곳을 찾아 주민들과 노숙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폴 콜먼은 도심에 가까이 위치해 있으면서도 생태적 다양성을 간직하고 있는 앞산의 존재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리고 작은 편의를 위해 자연 파괴를 서슴지 않는 한국이 국토관리의 부실로 황사문제를 유발하고 있는 중국을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난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국가기관이 국토파괴에 앞장서고 민간이 자연환경의 보호에 온몸을 던져야하는 관행이 대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국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자연환경 보전을 위해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지구가 아파요”라는 구호를 걸고 자연보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무분별한 개발과 오염행위로 지구환경이 몸살을 앓고 있으므로 우리가 자연을 돕자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인간이 자연환경을 보전하여야 하는 이유가 아파하는 자연을 돕기 위한 자선적 행위로 생각해도 좋은 것일까?

인간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 적어도 그 원료를 자연에서 얻는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쓰레기(각종 오염물질)를 배출해야 하는데 그것을 처리해 주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이 건강해야만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고, 청결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에게서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으며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즉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독립적 존재이고 인간은 자연의 종속적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이 자연환경을 보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자신을 위한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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