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스럽다 함은 한가롭게 환경 따위를 생각한다는 부정의 의미도, 비난의 의미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당연하기에 새삼스레 언급하는 것조차 아까운 일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노융희 교수를 만나고 느낀 바가 바로 이것이다.***


[#사진1]“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기반으로 한 서구 중심의 산업문명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해온 문명이었고 그 패러다임 속에서의 진보는 실제 자연정복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인간만이 중심이자 주체이며 그 외 주변의 환경을 객체로 사고했고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데 과학과 기술이 사용됐습니다. 자연을 지배해 인간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해온 모든 체제는 그것이 자연주의든 사회주의든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을 진보로 생각하는 잘못된 진보관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 (중략)
그리고 서구논리학이 이분법적인 극단의 사고, 디지털한 사고를 보편화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을 변화시켜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비물질적인 가치, 배중률적인 사고가 아니라 복잡 미묘한 수많은 중간 범역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소중히 하는 인식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결국 환경문제의 근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생활스타일의 가치관 변혁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제자가 남긴 1992년 강의 녹취록 중에서…>


환경… 사회의 철학적 의지에 달렸다

노융희 교수를 만났다.
노 교수는 환경계의 내로라하는 원로다. 혹자는 그를 ‘환경계의 대부’라고도 부른다.
환경전문가 중의 전문가이자 행정 및 법학의 전문가이기도 하고 국토·도시계획 분야 전문가이도 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한 분야도 아닌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전문가이자 환경 1세대 원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노 교수로부터 환경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노 교수 앞에서 ‘환경’이라는 말을 쉽사리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환경’의 의미를 모르고 떠드는, 그리고 어쭙잖게 안다고 떠드는 사람 앞일수록 더더욱 그는 입을 다문다.
그렇다고 환경을 알고 모른다는 게 지식이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화려한 경력을 볼 때 ‘인간은 자연에 불과하다’는 그의 생태주의적 견해에 허탈한 웃음이 나올 정도다.
정작 노 교수 본인은 낯을 붉힐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행정학, 도시 및 지역계획학, 그리고 환경학 등을 처음으로 자리잡게 한 사람도 노 교수요, 대한국토계획학회·한국지방자치학회·한국환경정책학회 등을 창립한 사람도 바로 노 교수다. 도시 근교의 자연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린벨트, 즉 개발제한구역을 만든 사람도 바로 노 교수란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 만든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한 대안은 아니었다. 우선 노 교수는 모든 현상, 그중에서도 특히 환경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해 왔다. 사회적인 환경파괴 요인을 전체 관점으로 바라보고 과학기술로 환경문제를 막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결국 환경적인 문제 역시 그 사회의 철학적인 의지 문제에 달렸다는 것. 그게 바로 노 교수가 생각하는 ‘환경’이다.

환경보존계의 ‘트리오’ 모르면 간첩!

팔순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외모는 여전하지만 젊은 시절의 노 교수 사진을 보노라면 여느 영화배우를 뺨칠 만한 외모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젊은 시절 사진이 실린 기사가 있는지도 모른 채 기자가 건넨 30~40년 전 본인의 모습을 보고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어~”라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사진4][#사진5]노 교수와의 만남에 앞서 그를 아는 지인들은 한결같이 ‘일사회’라는 조직, 권숙표 교수(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 고문), 노재식 교수(학술원 회원)의 얘기를 덧붙이곤 했다. 그리고 막연히 ‘함께했던 당시 원로들이구나’ 생각하고 넘긴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 교수를 기억하는 관계자들이 언급한 원로들이 단순한 학문적 파트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노 교수를 만나고 몇 분이 채 지났을까. 일사회, 권숙표 교수, 노재식 교수, 소주 이야기까지…. 은연중 튀어나온 ‘술’이란 단어에 노융희 교수는 즉각적으로 ‘삼총사’ 이야기를 꺼낼 정도였다. 할 말도 많을 텐데 어린 시절 선물 받은 장난감을 자랑하듯 일명 ‘삼총사 멤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기어코 드러내고 만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라는 것.
이들의 본격적인 만남은 70년대에 시작됐다. 만났다 하면 얘깃거리는 단연 ‘환경’이었고 환경을 위해 뭔가를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로 의기투합해 발 벗고 나서는 과정에서 한국환경문제협의회(76년)와 일사회(73년)를 만들어 한국 사회에서의 환경에 대한 기여를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80년 일사회 회의를 통해 환경권 조항을 헌법 개정안에 신설키로 논의하고 본격적인 일을 시작한 결과 80년 1월 환경청이 발족하면서 제5공화국 헌법에 드디어 ‘국민의 환경권’을 천명하게 됐다. 그리고 역사적인 그 순간이 바로 환경을 위해 힘써온 일 중 가장 값진 순간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참고로 일사회는 1월 4일에 만들어졌다 해서 ‘일사회(一史會)’란다. 76년에 발족됐으니 지난해로 정확히 30주년을 맞은 셈이다. 하지만 일사회(一史會)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뜻을 바꾼 일사회(逸士會)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일사회 멤버 중에서도 삼총사로 유명한 권숙표 교수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한 이래 위생화학 분야, 노융희 교수는 서울대 법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다음 사회과학 계열을 전문 영역으로 연구, 노재식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후 환경과학의 한 분야인 대기과학을 연구해 왔다.
각자의 연구분야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결같이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시간만 되면 만나 소주잔을 기울여 왔다고 한다. 삼총사답게 세 가지 공통점도 있어 쉽게 말해 황소고집·일중독·말술이라는 것…. 하지만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자는 없었던 것이었을까.

“당뇨로 쓰러졌었어. 병원에 2주 정도 입원까지 했지. 그 전까지만 해도 술·담배는 말도 못할 정도로 많이 했어. 6·25때 배운 건데… 절대 포기할 수 없었지(웃음) 요즘은 폭탄주를 즐겨 마신다고? 난 오로지 소주야.”

10년 전까지만 해도 셋이 모였다 하면 소주 대여섯 병은 기울이는 게 기본일 정도로 소주 사랑이 각별하다. 하지만 권 교수를 시작으로 건강문제가 불거지면서 노 교수 역시 2005년에 당뇨로 쓰러져 입원하는 일까지 겪었다. 그 후로 소주를 끊고 지난해부터는 담배까지 끊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됐다. 줄담배를 즐겼던 그였기에 쉽지 않은 결심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사진3]비이장목(飛耳長目) 같은 삶이라

“내가 65살 때… 그러니까 15년 전이지. 그때 정년퇴직을 했지만 75살 때까지만 해도 현역 때와 다름없이 강의도 하고, 주례도 열심히 서고, 일본에서 객원교수로도 열심히 가르치고, 다양한 행사에서 좌장도 맡고… 정말 활발한 활동을 했어. 근데 2002년이 지나면서부터 아무래도 사회생활에서 위축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때부터 학술논문을 제외한 글들을 묶어 집필하기 시작했지. 그게 바로 ‘비이장목’이야. 내가 77살 때 나온 거야.”

비이장목(飛耳長目)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먼 데서 일어나는 일을 능히 듣고 보는 귀와 눈을 의미한다. 즉 여러 가지를 놓고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이르는 말이다.
노 교수의 두 번째 수상록이기도 한 ‘비이장목’은 2004년 희수(喜壽)를 맞아 정년 이후 12년간 모아온 글로 집필한 책이다.
정년을 맞이한 1992년에 40년간 발표한 수상을 모아 만든 첫 번째 수상록 ‘요철면경(凹凸面鏡)’에 이어 직접 집필한 저서다. 그리고 올해 팔순을 맞아 그의 제자들과 지인들이 만들어 그에게 헌정한 책이 바로 ‘행운유수(行雲流水)’다. 요철면경, 비이장목, 행운유수…. 마치 노 교수의 일생을 차례대로 표현한 말인 듯하다. 하지만 그의 삶을 보고 과거와 미래는 있지만 현재는 없다고들 한다. 어릴 때 떠나온 고향 평안북도 정주,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늘 가슴 한 켠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주장학회에 남다른 애정을 쏟는지도 모른다.
정년퇴직을 하고 받은 퇴직금 4600만원 전액을 고스란히 장학회에 기부한 데다 지난해 인제인성 대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 2000만원까지 장학회는 물론 여러 단체에 기부해 정작 본인은 상금에 달린 세금을 부담해야 할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웃을 뿐이다.

“인간의 문명이 지나간 곳에 남는 게 무엇인 것 같은가. 바로 사막이야. 인간이 지나간 곳은 어김없이 사막화가 되는 것이지. 그런데 사막화는 육지에서만 진행되고 있는 게 아냐. 유전사업으로 지하까지 사막화되고 있어. 유전이 지하의 숲인데 그를 개발하고 있으니 지하에서도 사막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야.”

누구라도 ‘사막화’가 심각한 환경문제라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눈에 훤히 보이는 육지의 사막화에 대해서만 걱정할 뿐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지하의 사막화까지 심각하게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유전을 지하의 숲이라고 말하며 더 큰 우려의 목소리를 전하는 건 처음이다.
그리고 노 교수의 심경을 읽은 그의 제자가 전하는 한 마디도 잊히혀지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의 생존을 위한 발전을 추구해야 하고 이를 위해 사회 구석구석을 개조해야 한다고 지난 4반세기 동안 설파한 교수님의 열망이 현재 제자들과 후학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
다시금 환경이 ‘환경’이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라는 그의 말을 차분히 곱씹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노 교수의 몸이 안 좋다는 말에 인터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죄송스러웠지만 생각보다 정정한 모습, 그리고 밝은 모습에 초면이지만 반가움이 절로 생겨난 게 사실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노 교수와의 대화 역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만치 흥미진진했다는 점. 오히려 많은 얘기를 소화하기 어려워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대화가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 어두운 외길을 뚫고 꿋꿋이 걸어온 그에게 감히, 그리고 진심으로 존경을 뜻을 전하고 싶다.


***노융희 교수가 걸어온 길***

[#사진2]학 력
1952년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석사
1958년 미국 미네소타대학 석사
1973년 서울대학교 법학 박사 학위 취득

주요경력
1952~1954년 휘문중학교 교사
1954~1959년 숭실대 강사·조교수강사
1973~1992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
1973~1978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초대원장
1974~1978년 대한국토계획학회 회장
1978~1981년 국토개발연구원 초대원장
1992~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정주장학회 이사장
1997~2000년 일본 리츠메이칸대 정책과학대학원
객원교수
1997~1999년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이사장
2001~2005년 일사회 회장

주요 수상내역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1년 유엔환경계획 글로벌500상
1992년 제6회 현정국토개발상
2006년 제8회 인제인성 대상


<강재옥 기자·사진=유상희 기자>
※보다 자세한 내용은 2007년 월간환경 1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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