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정책전략 컨설팅그룹 GR코리아 김용균 상무

GR코리아 김용균 상무
김용균 상무 yongkyun.kim@gr-group.com 

[환경일보] 헌법에 따르면 법률 개정안은 ‘국회의원’과 ‘정부’가 발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의원 1인이 개정안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10명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고 국회법에 규정돼 있다. 하지만 의원 10명 이상이 같이 법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의원 1인이 법안을 만들고 나머지 의원들이 이에 대해 동의하면서 발의가 이뤄진다. 이렇게 법안을 만드는 것을 ‘대표발의’라고 하고, 동의하는 것을 ‘공동발의’라고 한다.

품앗이 법안 발의라는 말이 있다. 언론과 시민단체에서는 의원의 입법 실적을 따질 때 대표발의 건수와 통과 비율을 본다. 공동발의는 다른 의원이 한 것에 숟가락만 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동발의를 안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인이 대표발의 하는 법안을 위해 최소 의원 9인(10명이 최소 요건이므로 대표발의자 외에 9명이 더 필요하다)의 동의가 필요한데, 다른 의원 대표발의 법안에 공동발의를 해야만 본인 법안에 대한 동의를 얻기 쉽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입법의 취지와 효과를 따지는 것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공동발의라고 우습게 보다가 큰코다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품앗이 차원이나 친한 의원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동의 도장을 찍어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법안에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판단돼 동의를 철회하기도 한다.

2019년 5월, 수술실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의료법 개정안이 발의된 적이 있다. 하지만 발의 하루 뒤 발의 의원 10명 중 5명이 공동발의를 철회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3일 뒤 10명의 공동발의 의원이 동참해 법안은 무사히 발의되기는 했다. 발의를 철회한 의원들은 ‘보좌관이 내게 보고하지 않고 도장을 찍어줬다’, ‘의사들의 항의가 심하다’ 등의 이유를 들었다. 환자단체들로부터 ‘평소 보좌관이 입법을 결정했었나?’, ‘의사는 무섭고 환자는 안 무섭나?’ 등의 거센 항의를 들어야 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종교인 과세를 유예하는 소득세법 개정안 사례도 있었다. 지역구 종교인들의 부탁이나 무언의 압박으로 공동발의 했다가, 여론의 눈치를 보고 발의를 철회한 것이었다.

국회의원 발의보다 정부 법안 발의 절차는 더욱 복잡하고 장기간이 소요된다. 즉, 해당 부처의 법안 입안→관계 부처와의 협의→입법예고→규제심사→법제처 심사→차관회의→국무회의→대통령 재가 등의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법안이 국회로 제출된다. 이 과정만 보통 10개월 정도가 걸린다. 통과가 아니다. 의원 10명이 발의해 낸 법안과 동일하게 이 단계가 돼서야 국회 제출 절차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청부입법’이다. 무슨 청부살인도 아니고 조금 과격한 표현이지만, 언론에서 국회를 비판하기 위해 많이 쓰이는 것이 현실이다. 부처에서 이렇게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정부 입법 절차를 회피하기 위해 법안을 발의해 줄 만한 의원실에 찾아간다. 그것도 법안을 완벽하게 만들어 관련 자료까지 준비해서 말이다. 의원실 입장에서는 좋은 법안을 통해 대표발의 건수를 올릴 수 있다. 게다가 법안 심사과정에서 정부의 의견도 중요하므로, 부처가 가져온 것이라 부처가 옳소 할 것이니 통과 가능성도 높다. 실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주요국에 해외지사를 두고 정책 환경 조사를 주 업무로 하는 회사에 소속된 필자의 경험상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얼마 전 해외 정책담당자들에게 이런 현상을 설명할 기회가 있었는데 다들 의아해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민 입장에서 봐도 이러한 현상은 불쾌하기 그지없다. 정부를 견제하라고 둔 국회가 정부가 가져온 법안을 거의 그대로 발의한다? 그것도 겉으로는 자기가 만든 것처럼? 물론 정부가 국회를 상대로 법안 통과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 경우라도 법률 개정안을 만드는 입안은 의원실에서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 청부입법 관행이 지속된다면 국회는 ‘통법부’에 더해 ‘청부입법부’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쓸 것이다. 21대 국회에서는 달라진 모습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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