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압 송전선로 건설, 입주민 철회 요구

신뢰가 바탕이 된 담론으로 갈등 풀어야

 

김창수 비자사진
▲부경대학교 행정학과 김창수 교수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는 금년 12월과 내년 12월에 각각 신고리원전 1호기와 2호기가 완공된다. 그리고 여기에 맞춰 기장군 정관면과 경남의 양산 그리고 밀양을 거쳐 창녕군의 북경남변전소에 이르는 90.5㎞의 765㎸ 고압 송전철탑 162기 건설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한전이 2008년 8월 첫 삽을 뜬 뒤 2011년 5월 준공을 목표로 하는 고압 송전선로 공사와 관련한 갈등이 예사롭지 않은데, 여기서는 내가 살고 있는 부산의 사례만 들어 봤다.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신도시에 765㎸ 송전선로와 17기 송전철탑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2009년 초부터 입주를 시작한 정관신도시 입주민들은 인근에 고압 송전선로가 들어선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부산시가 정관신도시를 '생태환경도시'로 대대적으로 홍보해 입주를 결정했다고 한다. 8개 아파트단지 5천 세대 1만 5천명의 입주민들은 송전탑과의 이격거리가 800m에 불과해 전자파와 재산권 피해 그리고 경관훼손의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며 송전선로 계획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기장군 정관면의 이장, 상인연합회와 정관 산업단지 대표들로 구성된 ‘765㎸ 송전선로 백지화대책위원회’는 2010년 4월부터 주민서명을 받고 있고, 국회와 중앙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부산지방법원에는 공사 중지 가처분신청서를 제출했다. 9월4일부터는 주민궐기대회를 추진하면서 거칠게 가시를 세우고 있다. 한편 9월9일에 이르면 한전은 주민협의체를 구성해 대안을 모색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대책위원회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한전과 철회를 주장하는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고슴도치 딜레마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가까이 다가 갈수록 서로 친밀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런데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나 호저의 경우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로의 가시 때문에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흥미로운 우화를 생각해냈다. 이것이 유명한 호저 딜레마(porcupine dilemma)이다. 심리학자인 프로이드가 후에 그의 우화를 인용했는데, 그는 서로 따뜻함을 얻고자 하지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호저들의 우화를 그려냈다. 추운 날씨에 호저 그룹들은 서로 가까이 다가가 교호관계(close reciprocal relationship)를 형성하길 원하지만, 서로 찌르는 가시 때문에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이다. 최근 몇몇 학자들은 심각한 갈등국면에 처한 상황을 고슴도치 딜레마에 빗대곤 한다.

 

그러나 나는 서로 다가가는 인간이 그들의 이기심 때문에 서로 상처만 입힌다는 이러한 우화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딜레마에 빠진 이해관계자들이 찰스 팍스와 휴 밀러가 제안하는 진정한 담론(authentic discourse)을 추구하면 갈등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담론 참여자들 사이의 신뢰가 바탕이 돼 자신만을 고려하는 원자화된 의도성과 이기심을 배제하고, 상대방의 얘기를 상대방의 입장에서 존경심으로 경청하며, 저명한 과학 공동체에 의해서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실질적인 공헌이 이루어진다면 가까이 다가갈수록 문제해결의 가능성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공사주체인 한전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에게도 진정한 담론형성의 무거운 책임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물론 2000년 전력수급계획 단계에서 관련 당사자들이 함께 고민했다면 좀 더 원만하게 갈등이 해결됐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제 집행단계에서 진정한 담론을 통해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국면에 이르렀다.

 

한전과 정관주민들에게는 <1995년 이후 반대의견을 가진 구성원들을 공정하게 포함한 입지선정위원회를 구성해 2002년까지 쓰레기소각장 건설에 성공한 구리시의 사례>가 벤치마킹의 대상이 된다. 특히 저명한 과학자를 동원해 다이옥신을 배출하는 소각시설의 절대적 안정성에 대한 확신을 주민들에게 부여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한전은 일단 800m 이격거리에 있는 주민들에게 전자파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리고 편익과 비용이 공정하게 배분되도록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입씨름 비용을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한다.

 

유럽에서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입지선정 등 갈등사례를 깊이 연구해온 런던 대학교 이본 라이든 교수는

'소통'을 통해서만 과학적 안전성은 물론 경제적 합리성까지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한전이 주민협의체를 만들자고 하는 제안을 지역주민들과 대책위원회는 거부하지 말고 일단 협상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위험사회를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당사자들이 안전성과 위험성은 물론 지가하락에 따른 보상의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진정한 담론에 임해야 한다. 매년 전력사용량이 증가하고 있는 영남지역 전기 공급을 위한 기간산업의 맥락에서 보면 정관주민들은 지역이기주의에 빠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시민들의 안전과 삶의 질에 대한 권리의식이 제고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러한 공리주의적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문제가 이미 불거진 집행단계가 아닌 입지결정 단계에서부터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무거운 책임감으로 함께 고민하고 협력해서 정책을 만들어가야 하는 협력기획(collaborative planning)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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