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지대학교 교양학과 홍성태 교수
2003년의 한·미 합의에 따라 용산 미군기지는 2007년까지 평택으로 이전될 계획이다. 1990년의 합의가 미군으로서는 ‘수동적 이전계획’이었다면, 2003년의 합의는 미군의 ‘적극적 이전계획’의 산물이다. 따라서 2003년의 합의는 1990년의 합의와 달리 사실상 파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첫째, 이전부지와 이전비용에 대한 문제다. 1990년의 합의와 마찬가지로 2003년의 합의도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돼 있다. 한·미관계는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있는 불평등관계이다. 미군은 한국의 보호자라는 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둘째, 이전 자체의 문제다. ‘이전’은 어디론가 옮기는 것이다. 용산에서는 미군기지가 없어지게 됐지만 평택에는 새로운 미군기지가 나타나게 됐다. 지금과 같은 미군기지의 이전 방식은 큰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한미군은 새로운 기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지를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전을 추진해야 한다.

셋째, ‘문제의 연쇄 고리’가 작동하고 있다. 평택지역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에는 평택 지역주민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미군기지 지역주민들과 시민운동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오랫동안 미군기지로 인해 고통 받았던 여러 지역에서 반환받는 미군기지를 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혔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합의의 문제가 전국적 저항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제 위에서 용산 미군기지의 활용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당연히 용산 미군기지의 공적 가치를 최대로 살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따라 제시된 구상이 바로 ‘용산 생태공원 구상’이다. 이에 대해 2000년 1월부터 문화연대의 발의로 시민사회에서 논의가 시작됐다. 그 결과 역사유적의 보전을 전제로 용산 미군기지 전체를 울창한 숲으로 조성하는 용산 생태공원 구상에 관한 폭넓은 합의가 이뤄졌다. 나는 이 구상에 ‘생명의 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생명의 숲 구상은 서울의 생태문화적 전환, 나아가 한국 사회의 생태문화적 전환을 추동하는 커다란 계기가 될 것이다. 생태문화적 전환은 문화적 삶의 바탕에 건강한 생태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자연과 문화를 대비시키는 근대 서구사회의 반생태적 자연관이나 문화관을 넘어서는 데서 생태문화적 전환의 길은 시작되는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의 생태문화적 재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용산 미군기지의 이용 및 오염 현황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해외 주둔 미군기지는 심각한 오염문제를 안고 있으며 용산 미군기지도 마찬가지다. 용산 미군기지의 생태문화적 재생은 오염의 파악과 복원으로 시작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용산 미군기지를 모두 숲으로 가꾸는 것으로 완성될 것이다.

1991년에 서울시는 17개의 소주제 공원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런 식으로는 이 땅의 의미를 크게 훼손하기 십상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자연이 살아 있는 공원, 곧 자연공원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호흡에 맞춰서 지내야 한다. 용산 미군기지를 이러한 숲으로 만든다면 이곳은 난개발 도시 서울을 치유하는 ‘생명의 숲’이 될 것이다.

이 숲은 북한산에서 남산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남북 녹지생태축을 되살리는 것이기도 하다. 용산 미군기지의 가치는 이러한 서울의 자연지리적 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 규모와 위치로 보면 용산 미군기지는 식민과 독재의 역사를 지나며 크게 파괴된 남북 녹지생태축을 크게 복원할 수 있는 막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울에서는 자연을 살리는 것이 곧 역사를 살리는 것이다. 서울은 본래 생태도시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용산 미군기지를 모두 숲으로 가꾸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새로운 생명의 숲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 먼저 수십 년 간에 걸친 난개발로 말미암아 망가진 서울의 자연을 되살리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생태적 자산이 될 것이다. 본래 서울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생태도시였으나, 박정희 대통령 이래의 난개발로 서울은 시멘트 도시·아파트 도시·자동차 도시·스모그 도시가 되고 말았다. 서울에 관한 어떤 조사에서도 서울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환경문제’로 나타난다. 서울의 환경문제는 시민의 건강은 물론이고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용산 미군기지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득 들어찬 숲이 조성된다면, 서울은 자연의 활력이 되살아나는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생명의 숲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소중한 ‘느림의 공간’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단히 바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서울에서의 삶은 더욱 더 그렇다. 시간기근증에 내몰려서 갈수록 삭막해지는 삶을 생명의 숲은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 것이다. 새로 조성될 숲이 생명의 숲인 까닭은 자연이 되살아나는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생명의 힘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서울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공간이 바로 이러한 느림의 공간으로서 자연이다. 자연이 살아 있는 생명의 숲은 우리 자신을 건강하게 살리는 생명의 숲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자연의 소중함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생태문화를 깊이 익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 살아 있어야 도시도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누구나 쉽게 배우게 될 것이다.

셋째, 새로운 생명의 숲에서는 여러 생명체가 서로 어우러져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우리는 자연의 풍요를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청신하게 할 것이다. 여러 생명체가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연의 원리를 몸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생태위기 시대에 생명의 숲은 자연을 지키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존중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의 숲은 대단히 소중한 생태적 학습의 공간이 될 것이다. 이로부터 생태위기 시대를 넘어설 생명문화가 크게 자라나게 될 것이다. 이로써 생명의 숲은 세계적인 생명문화의 터전으로서 서울을 대표하는 새로운 문화적 명소가 될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는 이러한 생명의 숲을 만들기에 충분히 넓은 땅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활용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자연적 활용과 인공적 활용이 그것이다.
생명의 숲 구상은 당연히 자연적 활용의 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핵심적인 방식이다. 용산 미군기지의 생태문화적 재생은 자연을 억압적으로 이용하는 활용이 아니라 자연을 살리고 적응해서 이용하는 활용의 산물이어야 한다.
자연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실제로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할 일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존의 숲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람하게 자란 포플러며 버즘나무들을 없애서는 안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용산 미군기지의 생태문화적 재생은 어떤 공간적 구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 사실 용산 미군기지의 구성은 다소 복잡하며, 또한 여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생명의 숲을 제대로 가꾸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대책이 필요하다.

돌려받는 용산 미군기지는 여러 땅들로 이뤄져 있다. 관련된 전체 면적은 117만 평에 이른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땅은 24만여 평의 메인포스트와 57만여 평의 사우스포스트다. 최소한 이 두 곳은 모두 생명의 숲으로 가꿔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삼각지에서 이태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하화해서 두 곳으로 나뉜 땅을 하나로 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생명의 숲이 남산 및 한강과 이어져서 생태축을 이어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미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서 긴 시간을 두고 복원계획을 마련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사실 생명의 숲 자체가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을 두고 완성돼야 한다.

또한 생명의 숲을 위해서는 인공시설을 최소로 줄여야 한다. 산책로도 가능한 오솔길 중심의 작은 길로 만들고, 오직 휠체어와 도보로만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이곳은 자연을 ‘이용’하는 곳이 아니라 자연을 지키며 익히는 곳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강조해야 한다. 요컨대 이곳은 자연을 지켜야 우리가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는 곳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의 인공시설을 적극적으로 줄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생명의 숲은 상식화된 공원 개념 자체를 크게 바꾸는 곳이 돼야 한다. 이런 식으로 자연이 살아 있는 도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향해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에는 없애야 할 인공시설들이 있는 반면에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야 할 문화유산도 있다. 조선시대에 종묘사직만큼이나 중요했던 ‘남단’의 자리로 알려진 곳이나, 일제시대에 건축된 근대 건축물들은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숲에 어린 역사를 지켜서 후손에게 물려줄 책임이 있다. 광복 이후에 지어진 엉터리 건축물들은 가능한 한 헐어 없애되 옛 건축물들은 잘 지켜서 이곳의 역사를 우리 후손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서울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용산 미군기지도 오랜 역사의 켜가 쌓여 있는 곳이다. 새로운 미 대사관이 들어설 곳에서 남단의 터가 발견된 것은 좋은 예다. 그런 만큼 섣불리 활용하기 전에 반드시 꼼꼼한 역사문화조사를 해야 한다. 보존될 근대 건축물들은 이곳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념관들이나 휴게실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문화의 면에서도 생태문화의 관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남북 녹지생태축을 되살리는 것은 근대화의 이름으로 마구 파괴된 서울의 역사를 되살리는 것이다. 본래 서울은 남북 녹지생태축을 비롯한 자연이 풍성하게 살아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망가진 자연을 되살리는 것은 그 자체로 서울의 역사를 되살리는 것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는가를, 또한 그 아름다움이 자연을 존중한 문화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제가 없이 오늘이 없고, 오늘이 없이 내일이 없다. 역사를 없애는 것은 오늘을 없애는 것이고, 또한 내일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지키고 되살리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같은 거대한 시설을 짓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역사를 살리는 것이다. 돌려받는 용산 미군기지를 숲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본래 서울의 면모를 훨씬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조상과 가까운 후손이 될 것이다. 이렇듯 생명의 숲 구상은 다차원적 성격을 갖는다. 이 점을 올바로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생명의 숲 구상은 파괴된 서울의 자연을 되살려서 잃어버린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린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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