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거실에서 바라다보이는 저 건너편에 교회가 있다. 교회 이름은 ‘좋은 교회’. 볼 때마다 좀 특이한 명칭이다 싶었는데 오늘따라 ‘좋은 교회’라는 낡은 팻말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아침 신문에서 교수들이 뽑은 2005년 사자성어로 ‘상화하택(上火下澤)’이 선정됐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인가보다.
주역에 나오는 ‘상화하택’은 ‘위에는 불, 아래에는 연못’이라는 뜻이며 ‘서로 이반하고 분열하는 현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라 운영을 방치하며 벌이는 정쟁, 행정복합도시 건설을 둘러싼 비생산적인 논쟁과 지역 갈등, 광복 60주년이 돼도 계속되는 이념 갈등에서 보이듯 서로 상생하지 못한 채 분열만을 거듭한 한 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울한 소식들 사이에도 우리 주위에는 ‘좋은 교회’처럼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바로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 같은….
얼마 전 그 경비 아저씨가 새로 오고부터 음식물 쓰레기 수거통 주변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손을 씻기 위한, 수도꼭지를 단 고무통이 놓이고 수건까지 걸린 것이다. 음식 쓰레기를 쏟은 후 늘 손이 찜찜했는데 무척 반가웠다. 비에 젖을까봐 수건걸이에 지붕까지 해 단 것이 얼마나 깜찍한지, 보는 사람이 즐겁기까지 했다. 냄새 풍기는 쓰레기장 옆에 빨강 노랑 원색의 깨끗한 수건이 걸린 게 색다른 풍경이 됐다. 고무통에는 맑은 물이 가득 차 있고, 수도꼭지를 틀고 손을 씻을 때마다 감탄하곤 했다. 옆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풍겨도 물 한 줄기 덕분에 마음까지 상쾌해지니 말이다. 싱크대에서는 펑펑 쓰던 물이었는데 여기서는 물 한 방울도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궁금했지만 관리실에서 설치했겠거니 했다. 그러나 다른 동의 수거통 주변은 예전 그대로였다. 알고 보니 새로 온 경비 아저씨의 멋진 생각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나오는 물이 아니니 한 줄기만 흘리곤 얼른 꼭 잠그게 되는 것도 이걸 만들어놓은 아저씨의 정성이 고맙고 소중해서다. 늘 지저분하던 그 주변이 깔끔해졌음은 물론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참에 누가 내다 버린 옷걸이를 손봐서, 그 역시 버린 우산을 손질해서 주렁주렁 걸어놓았다. ‘쓰신 후 다시 걸어 놓아 주세요’라는 애교 섞인 글귀와 함께. 또 계단 벽에는 큰 숫자가 적힌 달력도 걸리고 매일의 날짜에 빨간 화살표로 표시까지 해 놓았다. 그걸 볼 때마다 그 발상이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오고, 뭔가 생각하게 했다. 빨간 화살표가 가리키는 숫자에 대해, 빨간 화살표가 가리키는 하루의 의미에 대해.

나만 그렇게 느꼈을까.
한번은 우연히 마주친 아저씨에게 너무 좋다고 얘기했더니 ‘뭘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하고는 오히려 수줍은 표정이었다.
경비 아저씨라면 그저 경비실 지키고 주변 청소나 하는 정도로만 알았는데 이 분은 뜻밖이었다. 한 사람의 정성이, 자기 일에 대한 성실함이 타인에게 주는 감동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작고 소소한 일에 감동하는가보다.

그를 보면서 지난 세월 교직에 몸담았던 나는 좋은 선생님이었나 새삼스레 돌아보게 됐다. 아이들의 교육에 내 젊음을 다 바쳤다고 자부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자만이 아니었나 하고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러나 그런 성찰의 시간은 앞으로의 내 인생에 나침판이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우직한 자세’라고 한 김수환 추기경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위선이 많이 드러난 점을 빗댄 ‘양두구육(羊頭狗肉)’이 ‘상화하택’의 뒤를 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경비 아저씨 같은 그런 자세, 우직함을 지닌 좋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가 우리를 살맛나게 한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아파트 출입구 유리문의 손잡이도 은색의 도톰한 스티로폼으로 감싸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없던 일이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느껴지는 포근한 손의 감촉.
좋은 사람들의 마음 따뜻한 이야기가 새삼 그리워지는 때.
오늘도 우리의 경비 아저씨는 주민들을 위해 뭔가 궁리하며 종종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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