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만 있고 전략은 없는 기후공약
가짜뉴스와 왜곡된 정보로 토론장 왜곡

‘탈석탄’, ‘NDC’, ‘RE100’‧‧‧모두 실종
에너지 전환 없는 미래, 정치가 멈췄다

지난 5월23일 열린 제21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TV토론회에서는 ‘기후위기 대응 방안’을 주제로 논의가 진행됐다. /사진=공동사진취재단

[환경일보] 김인성 기자 = 정치가 기후위기를 담아내는 데 실패하고 있다. 지난 5월23일 열린 제21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TV토론회는 ‘기후위기 대응 방안’을 독립 주제로 처음 설정했다.

 기후위기, ‘중심 의제’로 올라섰지만··· 토론 내용은 낙제점

하지만 이례적인 형식적 진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내용과 정책 제안은 부실했고, 일부 후보들은 오히려 사실과 다른 발언으로 공공 담론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비평센터에 따르면, 이번 토론은 “기후위기를 정면으로 다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후보들의 이해도와 준비 부족이 명백하게 드러난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아예 “기후정치의 부재를 확인한 토론”이라는 혹평도 나왔다.

온실가스 감축목표는커녕, ‘기후’라는 단어조차 사라져

국제사회는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각국이 5년마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설정하고 유엔에 제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올해 9월까지는 2035년 감축 목표(NDC 2차)를 갱신해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날 토론에서 NDC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온실가스”라는 말조차 권영국 후보를 제외하고는 언급되지 않았다. 권 후보는 “온실가스의 43%를 대기업과 부유층이 배출하는데, 그 피해는 가난한 국민이 떠안고 있다”며 ‘기후정의세’ 도입을 주장했지만, 다른 후보들은 이에 대한 반론조차 제기하지 않았다.

정책보다 ‘정치’가 앞선 토론장··· 본질 흐려져

공약 발표가 끝난 후 이어진 6분30초 주도권 토론에서 기후에 대한 언급은 실종됐다. 대신 원전과 태양광, 풍력을 둘러싼 기존의 산업정책적 논쟁으로 흘렀으며, 그마저도 근거 없는 주장과 왜곡된 사실이 오갔다.

김문수 후보는 “후쿠시마 원전은 폭발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했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전 1·3·4호기에서 실제 수소폭발이 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준석 후보는 “태풍이 풍력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태양광은 한국의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해외 사례와 에너지 보고서에 정면으로 반한다.

기후 공약 ‘있으나 마나’··· 구체성 전무

이재명 후보는 ‘선진국 수준 감축 로드맵’을, 권영국 후보는 ‘2035년까지 70% 감축’을 공약했지만 실행 계획은 없었다. 김문수, 이준석 후보는 아예 기후공약 자체가 없는 상태였다. 환경운동연합은 24일 발표한 논평에서 “선거에서 기후위기를 주요 의제로 끌어올린 성과는 분명하지만, 토론회 내용을 보면 정책 경쟁이 실종됐다”고 꼬집었다.

특히 ‘탈석탄’ 공약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나 실행 시기, 방법 등이 빠졌고, 탄소흡수원 확대, 생태계 복원 등 생존과 직결되는 주제들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김문수 국민의힘, 권영국 민주노동당,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왼쪽부터) /사진=국회사진기자단

RE100 폄훼와 재생에너지 왜곡, 국제 흐름 역행

김문수 후보는 “RE100은 불가능한 구호”라며 원자력 발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 400여 개 대기업이 참여 중인 RE100 캠페인은 명확한 목표와 실행 경로를 기반으로 작동 중이다. 한국에서도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기업들이 동참하고 있으며, 정부의 뒷받침이 절실한 시점이다.

기후에너지정책연구소 정서진 박사는 “RE100을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건 기후 대응뿐 아니라 한국 산업 경쟁력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낸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이 국제 기준에 맞춘 에너지 조달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데, 정치는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생에너지 잠재력은 충분”··· 비용경쟁력도 원전 추월

후보들의 발언과 달리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이 충분한 재생에너지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에너지공단은 한국의 경제적 재생에너지 잠재량을 926TWh로 추산, 이는 연간 발전량의 1.5배에 해당한다.

또한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2030년 한국에서 태양광의 균등화발전비용(LCOE)은 원전보다 낮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적 비용을 포함하지 않아도 태양광이 가장 저렴한 전원이 되며, 원자력은 사고 위험 및 핵폐기물 처리 비용까지 반영할 경우 경제성이 크게 떨어진다고 분석했다.

유권자들 외면한 ‘기후 공백’··· 정책 경쟁 시급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전기 생산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경제 구조와 사회 시스템 전반의 개혁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선 후보들은 그 책임에 걸맞는 정책적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토론에서 그런 비전을 엿보기는 어려웠다.

기후 위기는 더 이상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폭염·산불·폭우 등 일상 속에서 현실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대선 후보들이 보여준 ‘기후 빈곤 토론’은 정치가 얼마나 현실로부터 단절돼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기후유권자’ 시대··· 정치도 변해야 한다

정치가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 더 이상 변죽만 울려서는 안 된다. 유권자들이 묻고 있다. “우리의 생존과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가?”

환경운동연합, 에너지전환포럼,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시민단체들은 잇따라 성명을 내고 “기후공약 재정비와 책임 있는 토론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예산, 로드맵, 탈탄소 산업 전략이 정당의 중심공약이 되어야 한다”며 “다음 토론에서는 실질적인 정책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정치가 빈틈없이 작동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제안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몫이기도 하다. 기후위기 시대, 유권자의 질문은 더욱 구체적이고 엄중하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정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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